컬러 TV

TV와 방송권력[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대략 197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이르는 약 20여 년 동안 한국에서 지상파 TV는 대중음악, 이른바 가요를 ‘정의’하고 ‘직조’하는 주체였다. 쇼 프로그램이나 순위 프로그램의 포맷의 음악방송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유행을 반영하는 것을 넘어 선도했다. 이런 환경에서 음악의 ‘매개자’인방송사가 음악의 ‘생산자’인 음반사에 대해서 늘 우월한 권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1980년대 수용자 입장에서도 음반(노래)에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바로 방송이었다. 가수들의 가장 강력한 생계 수단 역시 방송 출연과 밤무대 활동이 대부분이었다. 한국의 경우 TV 매체 이외의 모든 문화 산업은 대부분 스타의 생산과 인기유지, 활용 등 스타를 둘러싼 거의 모든 행위를 텔레비전 산업에 의존했다. 음반 산업의 가수들 역시 텔레비전 가요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부르는 곡이 인기가 있을 경우에 한하여 스타로 탄생한다. 따라서 이들 역시 텔레비전 의존성이 강했다.


방송 출연은 가수들에게 생계의 문제였고, 이 중에서도 연말 가요제 후보자가 된다는 건 커다란 자산으로 작용됐다. 음반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음반기획사는 전국적으로 볼 때, 대부분 약 286개 업체 이상이 서울에 집중돼 있었고, 경기도에 약 20개 업체가 있었다. 음반사가 서울에 집중된 이유는 음악과 음반에 관련된 모든 산업이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지역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입지 요인 중 가장 중요한 조건은 바로 방송국과의 접근성이 가장 좋아야했다.


음반사 입장에서도 자신의 회사에 소속된 가수들의 홍보에 가장 중점을 두었던 게 바로 방송 출연이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당대의 흐름을주도하고 생산해냈던 음반사들의 활동 또한 방송에 주력했다는 판단 하에, 연말가요제 후보자와 그들의 노래를 또 하나의 주요 근거로 삼았다.

TV의 대중화와 한국 대중음악의 방송 진입[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한국에서 지상파 TV는 1990년대 말까지, 즉 인터넷을 비롯한 뉴미디어가 등장하기 전까지 대중음악의 가장 강력한 형성자였다. 여기서 ‘형성자’라는 용어를 쓴 것은 TV가 단지 음악의 인기를 반영한 것이 아니라 그 인기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음악방송의 프로듀서들은 마음만 먹으면 특정곡을 히트시킬 수 있는 존재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1990년대 말까지 한국 대중음악의 가장 큰 촉진자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아닌 바로 TV이었다는 대목이다.

1970년대 흑백 TV의 대중화와 방송의 오락화[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1960~1970년대 텔레비전에서 연예 프로그램, 특히 가요프로그램은 급속도로 증가했다. 가요 정규 프로그램이 연평균 9.6편이 방송되었고, MBC가 등장했던 1969~1980년에는 연평균 7.0편이 방송됐다. 가장 먼저 등장한 가요 프로그램은 1962년 KBS의〈가요 퍼레이드〉로 주말의 황금 시간대를 차지했다. 이어 1964~1965년에는 그 주에 히트한 국내외 대중가요를 방송하는 공개방송 프로그램〈힛 퍼레이드〉등의 프로그램이 신설됐고, 1966~67년에는 KBS와 TBC를 합쳐 20개가 넘는 가요프로그램이 방영됐다. 여기에 1969년에 개국한 MBC도 가요프로그램의 활성화에 뛰어들어 윤복희, 김상희 등 인가가수의 이름을 내세운 음악프로그램들을 기획했고, 1971년에는 한국 최초의 차트 프로그램인 〈무궁화 인기가요(금주의 인기가요)〉가 만들어졌다. 1970년대 이전에도 이미 방송사는 각종 가요 프로그램을 신설해 한국 대중음악 유통의 기반 역할을 한다. 이는 1970년대 들어 더욱 활성화 된다.


1970년대 들어서면 한국 사회는 급속하게 대중사회의 성격을 띠게 된다. 그와함께 한국 사회는 본격적으로 상품화된 대중문화의 시대로 접어든다. 대중문화 산업의 소유주(광고주)가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고, 매스미디어 체제가 정비되며 빠르게 확산됨으로써 대중문화의 생산, 유통, 소비의 구조적 기반이 완성되었다. 대중문화가 가장 강력하게 홍보되고 소비되는 수단은 매스미디어, 그중에서도 TV 방송이었다. 1970년 당시 37만대였던 TV는 1979년에 이르러 596만대로 16배나 폭증한다. 방송매체가 연예산업을 주도하는 원인은 첫째, 방송이 전 국민에게 가장 널리 보급된 매체로 그 오락적 영향력이 다른 매체들을 압도하고, 둘째, 3대 방송사가 방송지원과 시장의 98%를 독점하는 수직적 통합 체제를 유지해왔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셋째, 안정된 광고 수입과 수신료 수입에 힘입어 막대한 제작비를 투자하여 경쟁력 있는 제품을 생산, 공급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넷째, 텔레비전은 탤런트, 가수, 코미디언들이 인기와 공신력을 쌓을 수 있는 1차적 진입 시장으로서 기능한다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국민소득이 늘면서 국민의 생활양식이 변해가자 방송사는앞 다투어 오락 프로그램을 반영한다. TBC의 《쇼쇼쇼》와 MBC의 《토요일밤》, 그리고 KBS의 《가요제》(70년대 후반에는 《가요대행진》)가 TV쇼의대종을 이루었다. 70년대 초에는 윤형주, 송창식, 조영남, 김추자, 김상희, 펄시스터즈, 하춘하, 나훈아 등이 활약했고, 76년부터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판매기록 20만 장을 돌파한 조용필과 최백호, 78년에는 혜은이가, 그 한편으로는 산울림과 사랑과 평화 등 중창단이 두각을 나타낸다. 7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조영남, 패티김의 귀국공연 등과 함께 국내 가수의 외국 가요제의 번번한 입상 등 이 겹쳐 기획의 대형화와 국제화가 두드러진다.


TV 보급률이 100만대가 넘어선 시점, 정부가 담화문을 발표할 정도로 당대인들은 TV에 매료됐고, 쇼가 주종을 이룬다. 대중음악 또한 방송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TV를 통해 수많은 스타를 배출한다. 70년대 흑백 TV는 대중이 사랑하는 가장 강력한 매체로 변모한다.1980년대 들어 한국 대중문화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 또한 컬러 TV다. 애초 박정희 정권은 제2차 석유 파동 등 국외 요인을 들어 컬러 TV 방송 도입을 1980년대 후반으로 미뤄놓았다. 그러나 12 ·12사태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는또 다시 대중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1980년부터 컬러 TV 방송을 허용한다.

1980년대 컬러 TV가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1980년 12월 1일, 한국 또한 세계에서 81번째로 컬러 TV 방송 시대를 열었다. 컬러 TV의 수신기 보급은 컬러 방송 시작 1년여 만인 1981년에 무려 2백만 대를 돌파했으며, 82~83년에 3백만 대, 83~84년에 4백만 대, 85~86년에는 5백만대에 이르렀다.


방송사 통․폐합 조치로 KBS가 동아, 동양방송 등의 민간방송을 흡수한 1980년 이후는 대중매체의 폭발기로서, 컬러 TV 방송이 시작되자마자 다양한 버라이어티 쇼 프로그램들이 제작되었다. 컬러 방송을 실시하면서 음악 이외에 조명, 무대와 미술 세트, 음향 시스템 등 음악 프로그램과 관련된 하드웨어적인 측면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음악인들에게도 음악적인 능력보다 화려한 무대 매너 및 컬러 TV에 걸 맞는 외모 등이 점점 중요시되기 시작하였다. 이제 음반 홍보 수단으로서의 방송매체가 본격적으로 그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의 주류 대중음악계는 점점 TV에 노출함으로써 매출을 극대화할 수 있는 비주얼이 강조된 상업적 성격의 음악들을 추구하게 되었다. 각 방송사들은 젊은 세대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음악 프로그램들을 신설하였다.


또한 전두환의 신군부도 컬러 TV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신군부의 정권 창출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정권의 안정과 국민의 지지 협력을 유도하기 위해서 방송의 국민 동원과 통합 기능을 최대한 활용했다. 제5공화국 시기에 텔레비전에서 나타난 편성의 특징은 중 하나는 대형 이벤트 개발과 프로그램 대형화를들 수 있다. ‘국풍 81’, ‘3시간 드라마’, ‘100분 쇼’ 등 종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대형 이벤트와 프로그램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장시간 토론, 장시간 생방송들이 유행했으며, 급기야는 134일간 계속된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탄생시키게 되었다.


텔레비전의 컬러화가 방송에 미친 영향은 편성에 있어서는 프로그램이 더욱 다양화되었고, 대형화 추세를 보여주었으며, 쇼 프로그램의 비중이 크게 높아졌다는 사실 외에도 뉴스 프로그램의 편성이 확대되고 비중이 높아졌다는 사실을들 수 있다. 제작에 있어서는 드라마나 쇼 등 오락 프로그램의 구성이 다채롭고화려하게 되었으며, 보도 및 다큐멘터리 등 사실적 프로그램의 다양화, 심층화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야외촬영과 해외취재 프로그램이 활성화됐으며, 스포츠 프로그램도 크게 부각되었다.

KBS가 발간한 《한국방송 60년사》- 컬러화가 방송에 미친 영향[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① 대형 프로그램의 집중편성

② 보도 프로그램의 광역 심층화

③ 화려한 쇼․오락 프로그램의 활성화

④ 어린이 프로그램과 교양 프로그램의 신설 및 강화


MBC가 발간한 《문화방송사사》- 컬러화가 방송에 미친 영향[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컬러 방송으로 시청자에게 의식구조에서부터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많은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는데,

흑백의 단조로운 문화에서 다양하고 새로운 색채문화를 창조하게 되었고, 모든 분야에서 컬러 문화의 새 바람을 일으켰다.


컬러 TV는 한국 사회를 소비자본주의 체제로 빠르게 편입시키며,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왔다. 또한 방송 광고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며 대량 소비의 촉진제 역할을 한다. 컬러 TV의 등장으로 영화 산업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통폐합된 방송은 쇼 프로그램과 스포츠 중계에 집중한다. 따라서 당시 음반사들이 TV 홍보에 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컬러 TV로 인한 환경 변화는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는 댄스 음악이 주류 장르로 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된다.
대표곡
우리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