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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훈 인터뷰 (1부)

주영훈 인터뷰 01-차트를 지배하던 스타 작곡가


1990년대 댄스 음악을 이야기할 때 주영훈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윤일상과 더불어 우리가 기억하는 그 시대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명의 작곡가 지망생에서 스타 작곡가로 발돋움한 그는 엄정화, 터보, 코요태의 히트곡을 쏟아냈을 뿐 아니라, 그 자신도 방송을 통해 활발한 활동을 했다. 예능인 주영훈이 아닌, 작곡가이자 한국 대중음악의 중심에 있었던 주영훈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화려한 방송 조명 뒤편에서 벌어졌던 1990년대 가요계의 에피소드를 아카이빙한다.


올해로 작곡을 시작한 지 몇 년이나 되신 건가요?

1993년부터 했으니까 28년이네요. 스물셋, 네 살 무렵이었어요.


그동안 저작권협회에 등록된 곡은 얼마나 되나요?

대략 420곡 정도예요. 근데 420곡이 다 뜬 건 아니고 알려진 곡은 한 10분의 1 정도죠.


어릴 때부터 작곡가가 꿈이었나요?

원래 음악을 좋아했어요. 아버지가 매우 보수적인 목사님이라 찬송가를 제외한 모든 음악을 배척하셨지만, 전 중학교 때부터 대학가요제 나가는 게 꿈이었죠. 특히 팝에 심취해서 초등학교 5학년 때 입장료 오천 원을 내고 혼자서 둘리스(The Dooleys) 내한 공연에 갔을 정도였어요. 중, 고등학생 시절엔 주한미군방송(AFKN)의 ‘아메리칸 톱40’ 방송을 들으면서 디제이가 소개하는 빌보드 차트를 매주 받아 적었죠. 포리너, 시카고, 왬, 마돈나, 팔코(Falco), 휘트니 휴스턴... 데이비드 포스터가 만든 시카고의 ‘You’re the inspiration’은 지금 들어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좋아요.


가요 대신 주로 팝송을 들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가요도 듣긴 했는데 아무래도 기대치에 못 미쳤어요. 특히 록이나 댄스 음악은 더욱 그랬죠. 당시만 해도 우리는 다 리얼 드럼으로 댄스곡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해외에선 진작 미디 음악을 시작했기 때문에 건반을 연결해서 손가락으로 치는 드럼이 발달해 있었죠. 팔코의 ‘Rock Me Amadeus’ 같은 드럼 머신 사운드를 듣다가 가요를 들으면 뭔가 유치한 것 같았어요. 만족스럽지 않았던 거죠.


그럼 가요에서 변화를 느낀 건 언제쯤이었나요?

1980년대 후반에 소방차가 나오고 댄스 음악이 크게 유행하면서였어요. 그 무렵에 우리도 미디 음악을 천천히 시작했죠. 악기도 유통이 많이 됐고요. 그러다 절정을 이룬 게 1990년대 초반, 윤상 씨가 미디 음악으로 앨범 전체를 만든 걸 미국에서 듣고 ‘이거다, 드디어 한국도 시작됐구나’ 생각했어요. 당시 미국에서 유학 생활 중이었는데, 매일 시간이 날 때마다 악기점에 갔어요. 악기를 살 돈이 없는데, 악기점에 가면 해볼 수 있게 되어 있잖아요. 거기서 독학을 했어요. 직원에게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고. 그러다 1년 넘게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건반 악기를 구입하고, 집에서 데모 테이프를 만들었죠. 그때부터 백여 곡을 만들어서 한국에 나온 거예요.


작곡가의 꿈을 안고 돌아온 거군요.

당시 제 여비가 27만 원 정도였어요. 그때는 잡지 맨 뒷면에 팬레터를 받을 수 있는 기획사 주소와 연락처가 있었어요. 기획사마다 찾아가서 전단을 돌리듯 카세트테이프를 돌리면서 제 음악을 들어달라고 했죠. 6개월 이상 매일 지속된 일과였어요.


작곡가 주영훈의 음악을 처음으로 받아준 기획사는 어디였나요?

심신 씨가 있던 ‘한밭기획’이었어요. 소방차를 배출했고 태진아 씨, ‘너를 사랑하고도’를 부른 전유나 씨 등이 속한 회사였죠. 근데 처음부터 데모 테이프를 받아준 건 아니었고, 작업하게 된 일화가 있어요. 그 무렵 심신 씨가 점을 보러 가서 ‘어떤 작곡가에게 곡을 받으면 좋겠냐’ 물었더니 그분이 ‘이렇게 웃는 사람이 있어’ 하고 입 모양을 그려주더래요. 그러면서 입 옆에 점이 있는 친구가 대박을 낼 거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난 뒤, 우연히 여러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서 심신 씨를 만났는데, 저를 보더니 이리 와보라고 하더군요. 입 옆에 점이 난 사람을 한 번도 못 봤는데 저보고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작곡을 하는 사람이라고, 형님 기획사에도 다녀온 적 있다고 하니 ‘내가 부를 만한 노래를 만들 수 있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때 노래가 준비되어 있었군요.

전 어떤 가수, 어떤 기획사에서 의뢰해도 바로 곡을 줄 수 있었어요. 만들어둔 백여 곡에 트로트, 록, 댄스, 발라드 다 있었죠. 다음 날 심신 씨에게 어울릴 만한 노래를 골라 한밭기획을 찾아갔고, 결국 3집 앨범에 10곡 중 8곡을 제 곡으로 채웠어요. 한 번도 곡을 줘본 적 없는 작곡가였는데, 그러면서 제가 인정받았죠. 이후 같은 소속사였던 소방차의 재결합 앨범에 2곡을 쓰고, 태진아 씨가 한밭기획을 나와서 제작했던 성진우 씨의 1집을 만들었어요.


어떻게 보면 입 옆의 점 덕분에 작곡 일을 하게 된 거네요.

그렇죠. 아니었으면 더 오래 걸렸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미국에서 왔다는 것도 큰 어드밴티지로 작용했어요. 제가 미국에서 오래 산 것도 아니고 미국에서 음악을 공부하거나 디제이를 한 것도 아닌데, 미국에서 온 작곡가란 사실이 굉장히 신선했나 봐요. 심신 씨와의 작업을 시작으로 1990년대에 수많은 가수와 작업하며 당대의 히트곡을 연달아 탄생시켰죠. 지금까지 함께한 가수도 셀 수 없이 많겠어요.

늘 제 노래를 타이틀곡으로 쓰는 가수들이 있었어요. 제작자의 기호, 취향에 따라서 타이틀곡 작곡가는 정해져 있었거든요. 터보, 코요태, 엄정화 등이 그랬죠. 근데 히트가 안 된 가수까지 포함하면 1990년대에 활동한 가수 중에 저랑 안 해본 가수가 없을 거예요. 예를 들어 그룹 샵의 히트곡 중 제가 만든 노래는 없지만 샵의 앨범에 제 노래가 실리긴 했거든요. 당시엔 주영훈, 윤일상 곡을 받아 와야 레코드 회사에서 선급금을 준다고 얘기할 정도였어요. 한 곡이라도 달라고 조르는 분들도 계셨죠. 그래서 웬만한 1990년대 가수들과는 다 해본 것 같아요.


주영훈의 곡을 받으려고 하는 가수가 그야말로 줄을 섰던 거군요.

사무실에 걸려있는 화이트보드에 제가 그달에 곡을 써야 할 가수들이 쓰여 있는데, 당시 활동하는 가수 이름이 다 적혀 있었어요. 가수 이름 옆에 괄호하고 ‘댄2 발2’ 이런 식으로. 댄스곡 두 개, 발라드 두 개라는 뜻이죠. 그때 하도 ‘왜 곡을 빨리 안 주냐’고 전화를 많이 받아서 마치 빚 독촉을 받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라는 버릇이 있어요.


당시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은데요. 많죠. 곡을 쓰라는 협박을 받기도 했어요. SBS가 여의도에 있던 시절에 누가 잠깐 따라오라고 하더니 저를 차에 태워서 어느 사무실에 데려간 거예요. 사실 겁박을 한 건 아니고 커피, 음료도 주긴 했지만, 문신 있는 아저씨들 열댓 명이 둘러싸고 있는데 지금 생각하면 납치, 감금이죠. 그럼 ‘언제까지 댄스 2곡, 발라드 2곡을 쓰겠다’고 각서를 쓰고 풀려나곤 했어요. 곡 빨리 안 쓴다고 맞은 적도 있고요. 그렇다고 겁만 준 건 아니었어요. 술도 많이 사주셨고... 저도 거의 슈퍼 갑이었죠 그때. (웃음)


제작자들이 왜 그렇게 주영훈, 주영훈 했을까요?

일단 작곡가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던 시절이고요, 저와 윤일상 씨가 히트곡을 많이 내던 시절이니 저희에게 일이 많이 몰렸죠. 오죽하면 윤일상 씨랑 저는 데모가 없었어요. 일단 곡을 주면 그 곡이 좋든 안 좋든 저희 곡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냥 가져가는 거예요. 정말 찍어내기 바빴어요. 그래서 저는 누가 그때로 돌아가겠냐고 하면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해요.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그런데 1998년 무렵부터는 방송까지 시작하셨잖아요.

그래서 일이 더 많아졌죠. 방송을 하면 제작자들을 만나잖아요. 예전에는 오는 전화 안 받고, 바빠서 못 만난다고 하면 됐는데, 이제는 제작자들과 만나게 되니까 거절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일주일에 방송을 열세 개 할 때인데, 하루에 촬영을 세 개하고 새벽 한 시, 두 시에 끝나선 혼자 작업실에 가서 아침 여덟, 아홉 시까지 곡을 쓰고, 다시 녹음실을 가거나 방송을 하는 게 거의 매일이었어요. 졸음운전을 하다가 앞차와 접촉 사고도 많이 났어요. 작업실에 갈 때 그 스트레스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이었죠.


상상을 초월할 만큼 바쁜 시기였군요.

라디오 중간에 핸드폰으로 엔지니어와 통화를 하며 믹싱 상태를 모니터하고, 퀵 서비스 오토바이 아저씨 등에 매달려서 여의도 방송국을 이동할 정도였어요. 저는 저 스스로 회색분자라고 했어요. 방송이 끝나면 작업실에 가느라 방송 동료들과 어울릴 시간이 없었고, 작곡가들 모임에 가면 연예인이었죠. 어느 쪽에서도 늘 이방인이었어요.


영감이 떠올라야 곡을 쓸 텐데 어떻게 그렇게 계속 곡을 쓰셨어요?

당시에 ‘주영훈 노래는 딱 들으면 주영훈 노래 같아’ 이런 표현을 흔히 했잖아요. 지금 생각하면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그냥 찍어내기 바빴으니까요. 새로운 음악을 듣고, 뭔가 상상을 하고 영감을 얻고, 그럴 시간조차 없었죠. 그래서 지금 그때 음악을 들어보면 가끔 ‘이때 시간이 좀 더 많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인기 차트 10곡 중에 주영훈 씨 곡이 다섯, 여섯 곡에 육박하는 경우도 있었죠.

가장 많을 때는 KBS [가요톱10] 중 일곱 곡이 제 곡이었어요. 1위, 2위, 3위가 육각수, 성진우, 터보였는데 전부 제 곡이었고, 그 아래에도 제 곡이 있었어요. 어떻게 보면 제 인생의 자랑 같은 시기죠. 제가 2005년, 2006년 무렵부터 차트에서 점점 사라지면서 공허함이 찾아왔어요. 이전엔 차트에 내 노래가 몇 곡이 있나 보는 게 일상이었는데 시대가 흘러 이제 한 곡도 없는 걸 보고 굉장히 슬프더라고요.


주영훈 씨는 곡과 가사를 모두 쓴 경우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랬죠. 의도한 게 아니라 작사가를 만날 시간이 없었던 거예요. 지금처럼 메일이 있으면 메일을 보내면 되는데, 그때는 작사가를 직접 만나서 테이프를 주면 이분이 듣고 가사도 직접 주고 할 때에요. 팩스는 그다음이었죠. 그래서 제가 녹음실에 가면 배가 아프다고 하고 화장실을 갈 때가 많았어요. 왜냐하면 하도 여기저기 곡을 많이 줘서 솔직히 이 가수에게 무슨 노래를 줬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가사도 없으면 얼마나 불성실해 보여요. 그래서 반주 한번 틀어보라고 하고 화장실에 공책하고 볼펜을 들고 가서 30, 40분 동안 가사를 써오는 거예요. 그럼 가수는 가사가 오늘 녹음실에서 나왔는데 연습할 시간이 없잖아요. 그냥 거기서 연습 겸 녹음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실력 발휘를 다 못 하기도 했고... 그렇게 막 만들어 냈던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죄송하죠.


윤일상 씨는 작사가 이승호 씨와 파트너처럼 작업을 많이 했는데, 주영훈 씨는 어떠셨나요?

저도 이승호 씨랑 많이 했죠. 당시 이승호 씨가 댄스곡 작사가로 ‘원톱’이셨거든요. 제작자 중에 이승호 가사를 선호하는 제작자가 있었어요. 그런 분들은 제 곡을 받아서 바로 이승호 씨에게 전달하고 가사를 받았죠. 제가 만든 터보 노래 중 ‘이승호 작사, 주영훈 작곡’은 전부 제작자가 이승호 씨를 찾아가신 거예요. 제 꿈은 ‘박주연 작사, 주영훈 작곡’을 하는 거였는데, 결국 못 해서 한이 됐어요. 박주연 씨는 발라드 작사가로 원톱이었죠. 몇 번 시도를 해봤는데 주연 누나가 너무 바쁘셔서... 윤종신 씨가 제일 부러운 게 윤종신 씨는 박주연 작사, 윤종신 작곡이 있어요.


곡을 작업하면서 원래 생각한 가수에서 주인이 바뀌는 경우도 있었을 것 같아요.

앞서 얘기한 것처럼 누구에게 어떤 곡을 줬는지 헷갈릴 때가 많았어요. 비슷한 시기에 장혜진 씨와 육각수에게 발라드곡을 부탁받아서 써줬는데, 나중에 녹음실에 가서 확인해보니 제가 곡을 바꿔서 보낸 거예요. 장혜진의 ‘꿈의 대화’가 원래 육각수를 위해 만든 곡이었고, 육각수의 ‘다시’가 장혜진의 곡이었죠. 근데 양쪽 다 마음에 들어 했고, 저야 뭐 둘 다 제 곡이니까 키를 다시 맞추고 그냥 진행한 거예요.


엄정화의 ‘Festival’도 주인이 바뀐 노래로 유명하죠.

‘Festival’은 컨츄리 꼬꼬를 주려고 만들었다가 여러 가수를 거쳐 엄정화 씨에게 갔어요. 원래 컨츄리 꼬꼬 버전은 더 재밌게 만들었거든요. 빌리지 피플(Village People)의 ‘YMCA’처럼 인디언 복장을 하고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 상상을 하면서 만들었는데, 탁재훈 씨 말이 “우리가 코믹한데 노래까지 코믹하면 완전히 삼류가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Festival’이 돌아왔는데 이걸 엄정화 씨 제작자가 듣고 엄정화 시켜야겠다고 가져간 거죠. 엄정화 씨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며 싫어했지만. 엄정화 씨는 제가 만든 노래를 다 싫어했어요.


엄정화, 주영훈은 최고의 짝꿍 아니었나요? 아니에요. 아마 엄정화 씨도 인정할 거예요. 엄정화 씨가 제일 좋아한 작곡가는 정재형 씨, 제일 싫어한 작곡가가 저였어요. 저를 싫어한 건 아니고 제 음악 풍을 싫어했어요. 슬픈 ‘뽕끼’ 있는 댄스곡을 정말 싫어했죠. 근데 그게 잘 되니까 어쩔 수 없이 불렀을 거예요.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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