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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나비 인터뷰 (1부)

분당 키드들의 좌충우돌 성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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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나비는 한국 인디 역사의 한 분기점이 된 밴드다. 홍대앞이라는 인디 신의 메카 밖에서 결성되고 성장했다. 그 전까지의 밴드들이 가졌던 고정관념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고 팬을 만들어왔다. 얽메임이 없었기에 못할 게 없었고, 홍대 바깥에서 그들만의 길을 개척해왔다. 동네 친구들이 밴드를 만들기까지, 그리고 전국을 누비며 관객을 찾아가던 시절의 즐거운 고생담.


-두 분은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거예요?

최정훈 : 고등학교 1학년, 중학교 3학년 말 그쯤부터요.


-어릴 때 즐겨 들은 음악은 무엇인가요?

최정훈 : 어릴 때 듣던 음악은 당연히 밴드 음악들이었어요. 오지 오스본(Ozzy Osbourne)이나 본 조비(Bon Jovi).

김도형 : 메탈리카(Metallica). (웃음)

최정훈 : 저 같은 경우는 예외적으로 엘튼 존(Elton John)도요. 밴드 음악의 전성기는 사실 저희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이거든요. 그래서 그 1970년대, 80년대 음악을 많이 들은 것 같아요.


-두 분 다요?

김도형 : 네, 저희 둘이 좀 유별난 편이었어요. 유일하게 비슷한 음악을 공유했어요. 또래 친구들은 보통 그런 노래를 듣지 않았거든요.


-또래 친구들은 주로 어떤 음악을 들었는데요?

김도형 : 원더걸스나 그 무렵의 후크송(hook song)들이죠.

최정훈 : 한창 사춘기 때 원더걸스요. 원더걸스 ‘Tell Me’의 ‘어머나’에 또래 친구들은 막 뒤집어지는데, 저희는 오지 오스본에 박수 치고 노래하는 거 찾아보고 기타 솔로 찾아보고 그랬어요.


-그럼 그보다 훨씬 전 노래들은 무슨 방법으로 들으신 거예요?

최정훈 : 그냥 막 찾아 들었어요. 모든 음악을 들을 때 그렇지만, 예를 들어 본 조비에 꽂히면 ‘이런 음악 또 어디 있나’ 하면서 찾아보잖아요. 네이버 지식인이라든가. 그러다 보면 파이어하우스(Firehouse)도 알게 되고 스키드 로우(Skid Row)도 알게 되고, 그러다 올라가서 오지 오스본도 듣고 메탈리카도 듣고 그렇게 된 것 같아요.

김도형 : 그때 그런 계보 같은 게 인터넷에 정리가 되어 있었어요. 록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이 정리해둔 거죠. 이 밴드 먼저 듣고 그 다음 밴드 듣고 하는 루트가 있었어요.

최정훈 : 워낙 록 음악, 밴드 음악이 접하기 어려운 장르이다 보니 입문자부터 해서 올라가는 게 있던 걸로 기억해요.


-예를 들면요?

최정훈 : 가장 입문자용은 본 조비나 오아시스죠. 가장 끝에 있던 건 항상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가장 고수는 핑크 플로이드나...

김도형 : 그건 고수지. 뭐 메가데스(Megadeath) 이런 팀들도... (웃음)

최정훈 : 맞아. (웃음) 핑크 플로이드가 있으면 메가데스는 그 위에 있었어요. 그런 기억이 나요.


-그런 음악들이 지금 잔나비 음악의 기반이 된 건가요?

김도형 : 네, 일단은 저희끼리 소통이 너무 잘 되니까 그때 같이 들었던 음악의 느낌을 알고, 그 시절의 음악을 서로 잘 아니까 그 부분이 음악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죠.


-그럼 시작은 본 조비였던 건가요?

최정훈 : 전 엘튼 존이요.

김도형 : 전 센 거부터 시작했어요. 록 음악에 처음 빠지게 된 계기가 메탈리카였죠.


-그런 음악들을 처음엔 어떻게 접하신 거예요?

최정훈 : 전 어머니께서 그런 음악들을 차에서 들려주셨어요. 그래서 어릴 때 들으면서 좋아했던 음악들이 자란 후에 제가 좋아하는 음악이 된 것 같아요. 지금 와서 들으면 그때가 생각나는 음악들. 어릴 때 엄마 차에서 포근하게 듣던, 그런 추억이 만들어진 것 같아서요.

김도형 : 전 기타를 치다 보니 커버를 하잖아요. 그런 커버하는 곡들을 찾아 듣다 보니 메탈리카 같은 밴드를 접하게 되고, 그 곡을 카피하면서 점점 빠져들고, 더 많은 밴드를 찾게 되고 그랬어요.


-음악을 시작한 건 언제인가요?

최정훈 : 음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초등학교 5학년, 6학년 때였던 것 같아요.

김도형 : 나보다 1년 더 빨라. (웃음)

최정훈 : (웃음) 그쯤부터 막연하게 그냥 연예인이나 축구 선수, 관심받는 직업을 항상 장래 희망으로 했는데, 어느 날 5학년쯤부턴 가수가 하고 싶었고 6학년 때 딱 싱어송라이터가 되고 싶었어요. 왜냐면 엘튼 존이 그해에 내한 공연을 했는데, 홍보할 때 ‘세계 최고의 싱어송라이터 엘튼 존이 온다’ 이런 식으로 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머니께 여쭤봤죠. “싱어송라이터가 뭐야?” 그랬더니 곡을 쓰고 그걸 자기가 부르는 사람이라고 하셨어요. 근데 그 직업이 그때까지 제가 알았던 직업 중에 제일 멋있었어요. 오케이, 나도 싱어송라이터가 되자 하면서 막 피아노 잡고 말도 안 되는 곡 써보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시작이었어요.

김도형 : 저는 1년 더 늦어요. 중1 때부터. 그때 한창 빠진 게 서태지였어요. 그렇게 되고 싶어 했었죠. 그래서 패션도 중학생인데 머리를 어떻게든 막 기르려고 했어요. 제가 노래를 못했거든요. 근데 서태지처럼 너무 되고 싶어서 곡을 써서 부르고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리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게 내가 할 줄 아는 게 되고, 꿈으로 이어졌어요. 내 꿈이라고 해본 적은 없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면 내가 그때 그걸 좋아하고 잘하고 있는 것 같았던 거죠.


-그냥 어린 시절의 꿈으로 끝날 수도 있었을 텐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요.

최정훈 : 저희도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해요. 안 했을 수도 있는데, 분명히 하다가 중간에 그만둘 수도 있었을 텐데 여기까지 한 거 보면 신기하죠.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주변에서도 분명히 반대를 하긴 했고, 저희 스스로도 어려운 길일 거라고 생각을 많이 했는데 여기까지 왔네요. 이유는... 아, 그런 것 같아요. 이렇게 저희 둘이 만나고, 또 다른 멤버들을 만나면서 같이 음악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났던 게 지금까지 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 같아요. 도형이를 만나서 같이 밴드를 만들자고 했을 때 음악의 재미가 배는 뛰었거든요.

김도형 : 맞아요. 저처럼 별난 친구를 만나서... 이게 참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운명적인 만남으로 밴드의 일원이 되고, 자연스럽게 꿈이 이어지고, 지금까지 직업이 된 것 같아요.

최정훈 : 같이 공연할 수 있는 친구들을 학창 시절에도 그렇고 그 이후에도 계속 만난 게 이유 같습니다.


-그럼 잔나비의 시작은 두 분인 거예요?

최정훈 : 네. 그때 저도 곡을 쓰고 있고 이 친구도 곡을 쓰고 있었는데 서로의 존재는 모르는 상황이었어요. 그러다 어느 날 부모님 손에 이끌려 국어 학원에 갔어요. 저는 기타를 메고 갔죠. 티를 내야 하니까요. 근데 저랑 비슷한 부류의 애 한 명이 앉아 있더라고요. 얘기하다 보니까 얘도 밴드를 한다고 해서 밴드 하는 친구 하나 알게 됐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전 곡을 써도 피아노로 코드 잡고 음성 메모 같은 녹음기에 녹음하던 때인데, 이 친구는 벌써 인터페이스를 갖고 하기 시작했더라고요.

김도형 : 미디 음악에 빠져 있었어요.

최정훈 : ‘아, 얘랑 같이하면 진짜 재밌게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제가 하던 밴드에 공연이 잡혔는데, 밴드의 형들이 공부해야 한다고 다 나가서 밴드를 새로 구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거예요. 그때 이 친구가 하던 밴드가 있어서 같이 하자고 했죠. 그 공연을 준비하면서 너무 재밌었어요. 그게 지금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김도형 : 그 조합으로 밴드 대회도 나갔는데, 성적이 되게 좋았어요. 상 받고 그러니까 ‘우리 잘하는 것 같다’ 그랬죠 그땐. (웃음)

최정훈 : 같이 곡 써서 자작곡으로 공연했어요. 자작곡으로 경연에 나오는 팀은 저희밖에 없었죠. 고등학생이었으니까요. 청소년수련관에서 청소년 대회를 여는데, 거기 나가서 심지어 최우수상도 아니고 우수상을 받았어요. 최우수상은 고3 실용음악 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이었죠. 저희는 그냥 취미 수준으로 했는데 우수상을 탔었죠.


-그때 ‘이거 할 만 하겠는데’ 하는 생각이 강해진 거군요.

최정훈 : 그렇죠. 그때부터 이제 집에 가서 뻥튀기한 거예요. “아버지, 사람들이 나 천재래요.” (웃음) 그럼 부모님은 모르시니까 ‘아 진짜 얘가 천재인가 보다’ 하시면서 그때부터 약간 혹하셨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잔나비를 어떻게 결성하게 된 거예요?

최정훈 : 저희가 스물한 살쯤... 서로 밴드를 하자고 말은 못 했어요. 왜냐면 저희가 얼핏 들은 바로는, 그리고 저희가 생각할 때도 밴드라는 직업은 직업으로 갖기엔 조금 힘든 거였으니까요. 그냥 같이 곡 쓰자는 명분으로 다시 만나서 곡 작업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서로의 속마음을 얘기하다가, “야 이럴 거면 그냥 밴드 하자” 한 거죠. 그래서 처음에 친구 한 명을 데려다가 3인조로 시작을 했어요.


-그때 3인조로 잔나비란 이름을 붙인 거예요?

최정훈 : 네, 처음엔 밴드 이름이 정도령이었는데 그건 웃긴다고 해서 넘어가고... (웃음) 잔나비란 이름은 동네 친구가 지어줬어요.

김도형 : 너희 원숭이띠니까, 하면서요. (웃음)

최정훈 : “야, 정도령은 좀 아니지 않냐, 잔나비가 나은 것 같다” 그래서 “잔나비 좋다. 뭔가 프랑스 말 같고 좋다.” 했죠. 무슨 뜻이냐니까 한국말이라더라고요.

김도형 : 심지어 순우리말이래요. 산울림처럼 너무 멋지잖아요.


-그렇게 결성이 되어 최대 5인조로 활동을 했죠. 다른 멤버들은 어떻게 만났나요.

최정훈 : 베이스 치는 (장)경준은 저와 중학교 때 밴드를 같이 했어요. 스쿨밴드. 드럼 치는 (윤)결은 경준의 대학 동문이었죠.

김도형 : 건반 친 (유)영현은 제 중, 고등학교 동창이었어요. 서로 운명 같은 만남이었죠. 그 시기에 어떻게 딱 서로 다 들어맞게, 만날 수밖에 없는 그런 사이처럼요.

최정훈 : 뜻도 맞았고 정말 운처럼 그렇게 모인 것 같아요. 그 시기에 서로를 필요로 했고요. 서로를 필요로 했어도 시기가 안 맞을 땐 잘 안 됐거든요. 베이스 치는 경준 같은 경우도...

김도형 : 맞아요. 고등학교 때 같이 하다가 학업에 잠깐 집중해서 대학은 아나운서 이런 전공으로 갔어요. 음악을 포기한 상태였는데, 저희를 다시 만나면서 음악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나 다시 음악을 한 거죠.

최정훈 : 드럼 치는 결이 같은 경우도 워낙 성격이 불같아요. 드럼으로 못 살겠다고 해서 운동을 하고... 그러다 마지막으로 한번 해보자고 했던 게 저희 잔나비 오디션이었던 거예요. 저희가 나름 오디션이라고 친구들을 섭외해서 몇 명 오디션처럼 봤어요. 그 친구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상경해서 왔더라고요. 그땐 그 모습이 어설퍼 보였는데, 저희에겐 그런 친구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잘하는 친구보단 어설퍼도 같이 재밌게 할 수 있는 친구. 그런 친구가 저희와 맞았다는 게 운명인 것 같아요.


-초등학교 5, 6학년, 중학교 1학년 이때 꿈을 갖고 쭉 해왔는데, 팀 결성은 21살 때라고 하셨잖아요. 시간 차이가 꽤 나네요.

김도형 : 저희가 분당에서 자랐는데, 학구열이 엄청 심한 동네였어요. 음악만 하게 놔두시질 않았죠. 모든 부모님이 무조건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길 원하셨어요. 그런 학업 문제도 있었고... 저희는 중학교, 고등학교 초반 이때는 저희가 진짜 잘하는 줄 알았는데, 막상 고3 쯤 되어 보니 저희가 음악을 생각보다 잘 못 하는 거예요. 그래서 소질이 없나, 하는 순간도 찾아오고 그랬죠. 그러다 결국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음악을 하는 게 재밌어서 다시 제대로 시작하게 된 거예요.


-결성 당시와 지금 잔나비의 음악 스타일이 비슷한가요?

최정훈 : 많이 달라요. 그땐 용감하게 뭉치긴 했지만 음악을 만들 땐 용감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좀 대중적으로 많은 사람의 취향에 맞춰보자는 욕심을 냈다고 할까요. 근데 그게 어느 순간 굉장히 멍청한 짓이라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저희가 대중 작곡가도 아니고 우리 음악을 만들어야 하는 위치에 있는 밴드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행하던 마룬파이브(Maroon 5)나 콜드플레이(Coldplay) 그런 음악을 무조건 흉내만 내려고 했던 것 같아요. 사실 히트를 치고 싶은 마음보단 명곡을 만들고 싶었던 건데 어려서 잘 몰랐나 봐요. 그래서 첫 번째 미니 앨범까지는 당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스타일로 만들었어요.


-밴드로서 첫 공연, 첫 활동은 기억나세요? 클럽 공연이나 버스킹 같은 거요.

최정훈 : 저희는 클럽 공연과 버스킹을 병행했어요. 저희는 클럽 공연이 주중에 잡혀서 사람들이 얼마 없었거든요. 시간 될 때마다 나가서 길거리에서 버스킹을 했었죠.


-버스킹은 어디에서 했어요?

김도형 : 동네에서 제일 많이 했어요. 분당이요.

최정훈 : 저희 동네에서 제일 많이 했고, 그리고 코엑스, 신촌, 홍대... 가리지 않고 다녔던 것 같아요. 그때 시기적으로도 버스킹이라는 문화가 우리나라에 정착이 되고 있던 시기였어요. 5년 전... 그래서 코엑스에서도 버스킹을 하기 좋은 구역을 만들어줬어요. 그것도 원서를 넣고 오디션 같은 걸 봤죠. 그래도 어느 정도는 수준이 있어야 하니까. 거기서 공연을 했었죠.


-거기도 정해진 요일이나 시간대가 있나요?

김도형 : 그럼요. 어딜 가나 그건 중요한 부분인 것 같아요. 사실 사람들의 이목을 많이 끌 수 있는 팀이 좋은 자리, 시간에 하는 건 당연한 거죠.

최정훈 : 처음엔 뙤약볕 아래서 했어요. 버스킹 문화가 자리 잡기 전이라 마땅한 자리가 없기도 했어요. 그러다 나중엔 공연도 좀 길게 할 수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주변 상인 분들도 나와서 노래 들으시고 전기도 빌려주시고 했죠.


-버스킹으로 사운드를 구현하기에 힘들진 않았나요?

최정훈 : 그런 부분은 많이 내려놨던 것 같아요. 그냥 노래를 들려주고 연주를 들려줄 수 있다면 했죠. 저희가 할 수 있는 연주나 끝내주는 라이브 실력을 들려줄 수 있는 곳은 굉장히 한정적이었어요. 그걸 고집할 바에야 아예 고집을 피우지 말자, 하고 드럼 대신 조그만 카혼, 일렉트릭 베이스 대신 우쿨렐레 베이스, 일렉트릭 기타 대신 통기타에 마이크 하나 두고 했죠. 대신 스피커는 버스킹 스피커보다 조금 큰 걸 무겁게 들고 다니면서 했어요.


-그땐 어떤 노래를 주로 불렀어요?

김도형 : 작전을 짰어요. 사실 저희 노래를 초반에 하면 모르는 노래니까 사람들이 모이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커버곡을 많이 했죠. 반응을 봐가면서.

최정훈 : 그때그때 지나다니는 연령층과 시간대 같은 걸 잘 고려해서 불렀어요. 처음부터 세트리스트를 짜서 가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곡 리스트를 쭉 준비해놓고, 노래를 부르면서 눈치를 보는 거죠. 다음 곡은 뭘 해야겠다, 많이 몰렸을 때 자작곡을 하자 이렇게요.

김도형 : 영화관 앞에서 했는데 영화 끝나면 사람들이 막 몰려나오잖아요. 그 타이밍에 맞춰서 관심을 끌만한 노래를 하곤 했죠.


-커버 곡은 주로 뭘 했어요?

최정훈 : 너무 많은데, 제일 인기 많았던 건 델리 스파이스의 ‘고백’이었어요. 그리고 연달아서 뜨거운 감자의 ‘고백’을 하면 한 4, 50명 몰렸던 것 같아요. 그리고 크라잉넛의 ‘밤이 깊었네’도 인기 좋았죠. (웃음)

김도형 : 인기 진짜 좋았지.


-어릴 땐 팝 음악으로 시작을 했지만 그땐 한국 선배들의 노래를 했군요.

최정훈 : 아, 물론 한국 음악도 많이 들었죠. 팝 음악만 좋아한다고 편식하진 않았어요. 취향에 맞는 한국 음악도 많이 들었어요. 크라잉넛, 노브레인, 델리 스파이스 등.


-자작곡은 어떤 곡들이 있었나요.

최정훈 : 첫 번째 미니 앨범에 있던 곡들이 주 레퍼토리였어요. ‘Baby Maybe’, ‘See Your Eyes’. ‘로켓트’도 그렇고요.


-반응은 어땠나요?

최정훈 : 어떤 날은 굉장히 좋아서 막 들뜨게 만들다가, 어떤 날은 정말 매몰차게 돌아서 가실 때도 있었어요. 그래서 항상 갈피를 못 잡았던 것 같아요. 어떨 때 보면 되게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어떨 때는 안 좋아하시는 것 같고. 그땐 그런 눈치를 좀 봤어야만 했죠.


-버스킹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요?

김도형 : 만약 혼자 있으면 못했을 것 같아요. 같이 하니까 가끔 창피한 순간이 있어도 했죠.

최정훈 : 한 번은 저희가 너무 열정이 넘쳐서, 저희 작업실 동네에 조그만 하천 하나를 건너면 있는 큰 회사 앞에 자리를 펴고 점심시간에 버스킹을 하자고 했죠. 회사원 형, 누나들을 위로해 드리자는 거였어요. 되게 좋아하실 것 같다, 하면서요. 그렇게 자리를 펴고 노래를 하는데 생각과는 반응이 좀 다르더라고요. 좀 쉬고 싶은데 쟤들 시끄럽게 저러고 있나, 하는 반응이었어요. 몰랐던 거죠. 저희는 그냥 노래를 하면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그럴 땐 심적으로 좀 힘들기도 했어요. ‘음악이 환영받지 않는 곳이 있을 수도 있구나’ 하면서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저희가 너무 멍청한 짓을 한 거고 너무나 민폐를 끼친 건데, 그땐 욕심에 그랬던 것 같아요.


-가장 인상적이었던 버스킹 장소는 어디인가요?

김도형 : 동네에 중앙공원이 있는데, 거기 아기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악기를 계속 건드리는 거예요. 연주하고 있는데.

최정훈 : 스피커 앞에서 애들이 귀를 막고 있고, 기타 치고 있는데 기타 건드리고 건반 연주하고 있는데 옆에서 막 치고. (웃음) 위치 선정이 중요한데 그런 건 저희 불찰이었죠. 경치 좋다고 아무 데나 가서 자리 펴고.


-가장 처음 오른 홍대 클럽 무대는 어디였나요?

최정훈 : 클럽 FF였어요.

김도형 : 포털사이트에 클럽 FF 카페가 있었어요. 그 카페에 저희끼리 디지털카메라로 찍어서 오디션 신청을 올리고 연락을 기다린 거죠. 최정훈 : 데모는 아니고 라이브 하는 영상을 올렸어요. 1차 오디션이랄까요. 그걸 통과하면 사람이 많이 붐비지 않는 시간대에 가서 공연하고 괜찮으면 계속 부르는 그런 시스템이었죠.


-그 영상으로 합격이 결정되는 건가요?

최정훈 : 네, 그것도 연락이 굉장히 늦게 오거든요. (웃음) 한 한 달 정도 걸렸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읽음’은 뜨는데 계속 전화를 해서 닦달을 할 수도 없고. 그러다가 연락이 왔는데 진짜 날아다닐 듯이 기분이 좋았어요. 그래서 가서 공연하고... 또 공연이 좀 안 좋았다 싶은 날엔 문자해서 괜찮았는지 여쭤보고 그랬죠. 눈치를 봐야 하니까, 또 불러줘야 하니까.

김도형 : 그렇게 해서 처음엔 화요일, 그러다 사람 많은 주말반에 가서 하고. 그러면서 또 다른 클럽에서 공연할 기회가 생긴 것 같아요.


-주말반까지 간 걸 보면 반응이 괜찮았나 봐요. 최정훈 : 그냥 사장님들이 저희 열심히 하는 걸 귀엽게 봐주신 거 아닐까요. 저희가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리 조그만 클럽 공연이라고 해도 주말로 갈 정도였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요. 조금 어설펐고. 물론 음악 만드는 건 자신 있었지만, 공연에는 조금 자신이 없었는데, 그렇게 공연을 하나하나 하면서 저희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 같아요.


-클럽사장의 안목이 중요한 것 같네요. 당사자가 느끼기에 반응이 그렇게 크지 않았는데 공연을 주셨다고 하니까요.

김도형 : 진짜 중요해요.

최정훈 : 사장님들의 감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그냥 잘 되는 친구들, 반응 좋은 친구들을 무작정 좋은 시간대에 보내는 것보단, 클럽 고유의 음악적인 결에 맞게 팀을 올려보내는 센스라고 할까요.


-일종의 발탁이군요.

최정훈 : 그렇죠. 발탁하고 기용하는 거예요.

김도형 : 인디 신에 색깔을 부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시는 거죠. 한 시기의 색깔을 만들어주는...

최정훈 :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를 보면 그냥 짠 공연이 아닐 때가 매우 많아요. 시간대, 함께 하는 출연진 등을 모두 고려하죠.


-클럽마다 특징이 있었나요.

최정훈 : 사실 저희 때는 활동한 팀이 그리 많지 않아서 도드라지진 않았는데, 분명히 존재했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어떤 클럽에선 하루에 한 8팀 정도가 나오고, 어떤 클럽에선 작게 두세 팀이 나오고, 어떤 클럽에선 그냥 한 팀만 기획 공연처럼 하고. 장르적인 특성보단 그런 결이 좀 달랐어요.


-공연 페이는 어떻게 받았나요.

최정훈 : 클럽 측에서 관객들이 입장할 때 어느 팀 보러 왔냐고 물어보세요. 그럼 잔나비를 보러 온 분들이 열 분이 넘어야 페이 정산이 되는 식이었어요. 제 기억엔 10명이 넘었을 때 넘은 숫자 만큼에 2분의 1을 해서 클럽하고 저희가 나눠 갖고 그랬어요. 받기라도 하면 기분 좋은 날이에요.

김도형 : 많이 받았을 때도 저희 밥이라도 사 먹으라고 그냥 주시는구나 싶었어요. 멀리 왔으니까.

최정훈 : 그냥 주시는 거예요 정말. 지금은 없어졌지만 ‘클럽 타’라고 굉장히 오래된 클럽이 있었어요. 그때는 저희가 3인조로 할 때인데 드럼이 없으니까 제가 드럼을 치면서 노래하고 도형이는 발을 구르면서 기타를 치고 그랬거든요. 저희가 분당에서 홍대까지 드럼을 옮겨서 왔다 갔다 하고 그랬는데... 아무튼 공연 끝나고 페이를 받았어요. 그때 저희랑 다른 팀 포함해서 공연장에 온 분들이 10명이 안 됐거든요. 근데 5만 원인가를 주셨는데, 돌아오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사장님께서 챙겨주신 거죠.

김도형 : 우리끼리 이거 문제가 많다고 했어요. (웃음)

최정훈 : 문제가 많은 거죠. (웃음) 감동이었어요. 그렇게 사장님들이 물심양면으로 아티스트들을 잘 챙겨주셨어요. 그냥 손님을 데리고 오는 그런 존재로 보신 게 아니라, 정말 같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사람들로 봐주신 것 같아요.


-또 어떤 클럽들에서 공연했나요.

최정훈 : 클럽 타, 에반스라운지, 롤링홀, 상상마당...

김도형 : 고고스, 사운드홀릭시티도 있죠.


-분당에 살면서 굳이 홍대까지 왔던 이유가 뭔가요.

최정훈 : 그냥 밴드를 하려면, 더구나 인디 밴드를 하려면 당연하게 홍대에서 공연해야 한다는 공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있는 것 같은데요. 저희가 1세대 선배들 음악을 굉장히 많이 듣고 자랐는데, 그런 것처럼 저희도 그 안에 속하고 싶었던 기분도 있었어요. 인디 신이라는 곳에 저희도 소속되고 싶었던 마음에 홍대로 갔어요.


-인디, 하면 홍대라는 인식이 있었군요.

최정훈 : 인디하면 당연히 홍대 아니에요?

김도형 : 당연하죠.

최정훈 : 우리가 아무리 성남에 살지만 홍대로 가자, 그랬던 것 같아요.


-홍대에 가보니 정말 다르던가요?

김도형 : 일단 분당엔 밴드 문화 자체가 없는데, 홍대에 가면 기타 메고 다니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잖아요. 그런 거부터 분위기가 좀 달랐죠.

최정훈 : 그런데 항상 공연만 하고 바로 작업실로 다시 돌아왔어요. 저희에겐 홍대는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곳이지 거기 소속되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요. 여태까지 활동하면서 홍대 밴드다, 홍대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소속감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홍대는 저희에게 마치 ‘천하제일 무술대회’ 그런 것 같았어요. 가서 항상 이겨야 하는 것. 이겨서 다음번에는 더 좋은 인상을 심어줘야 하는 것. 음악을 들으시는 분에게나 우리 스스로에게나. 그런 곳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항상 열심히 준비해서 공연했던 기억이 나요.


-홍대 클럽에서 공연하면서 관객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걸 체감했던 시점은 언젠가요.

김도형 : 서서히 많아졌어요.

최정훈 : 정말 어느 날부터가 아니라 서서히, 항상 할 때마다 조금씩 많아졌어요. 마치 머리카락이 자라듯 ‘언제 이렇게 머리가 길었지?’ 이런 느낌으로요.


-클럽, 버스킹 공연 외에 또 신경 쓴 게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최정훈 : 다른 그룹들이 하는 건 기본적으로 다 했던 것 같아요.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어서 홍보한다든가, 포털에 인디 뮤지션들을 발굴해주는 플랫폼에 항상 영상 다 올리고 열심히 참여했어요. 그리고 저희 나름대로 팬분들과 함께 뭔가를 만들어 보자고 하면서 프로젝트 아닌 프로젝트도 하곤 했죠. ‘배달왕 잔나비’ 라고 해서 공연을 배달가는 식으로.


-공연 배달이요?

최정훈 : 사람들 모여 있는 곳에 불러주시면 우리가 무료로 가겠다고 했죠. 그런 곳에 가서 저희가 그분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 드리면 되는 거니까요. 20명 이상 모인 곳에 저희를 불러주시면 어디든 가겠습니다, ‘배달왕 잔나비’ 이렇게 했던 기억이 나요.


-어디를 다녔나요.

최정훈 : 강원도 두 번 가고 연신내... 네다섯 군데 갔어요.

김도형 : 주로 친구들끼리 파티하는 곳이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어딘가요.

최정훈 : 강원도 춘천이었나 원주였나 그랬는데, 그 친구 전화번호 아직 제 휴대폰에 있어요. (웃음)

김도형 : 잊지 못하지.

최정훈 : 중학생이었는데 친구들 모아놨다고, 본인 반 소집일이었나 방학식이었나 아무튼 그랬을 거예요. 왜냐면 그때 친구들이 모이니까 저희를 불렀겠죠. 이 친구가 저희를 보고 싶었는데 친구들이 모이는 날이 그날밖에 없었던 거예요. 학교로 갔더니 운동장에 친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어요. 어디서 공연 할지 물었더니 강당에서 하면 된다고 선생님께 허락을 받아놨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부모님들도 다 같이 오셨어요. 그래서 강당에 갔는데 제일 큰 공간은 공사 중이더라고요. 그 옆에 다용도실처럼 매트 쌓아둔 곳에서 애들을 매트에 앉혀놓고 공연을 했죠.

김도형 : 중학생 아이들에게 어떤 노래를 불러줘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는데 저희가 아는 수준에서 그때 당시에 그나마 엑소의 ‘으르렁’, 오렌지 캬라멜의 ‘까탈레나’가 괜찮겠더라고요.

최정훈 : 그걸 편곡해서 불렀는데 그때만 해도 그게 1, 2년 지난 곡이니 안 통하는 거예요. 그래서 ‘에이, 이럴 바에는 그냥 학부모님 좋아하시는 노래를 하자’ 하고 ‘서른 즈음에’ 이런 거 불렀죠. (웃음)

김도형 : 델리스파이스 ‘고백’, 뜨거운 감자 ‘고백’. (웃음)

최정훈 : 전 아직도 너무 뿌듯해요. 그때 와서 노래 부르던 그 형들이 저희라는 걸 그 친구들 중 몇몇은 알지 않을까요. 안다면 그 친구들 인생에서 어디 가서 말할 수 있을 만한 재밌는 이야깃거리는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나 중학교 때 조그만 데 와서 공연해준 형들이 있는데, 그게 가끔 TV 나오는 잔나비란 사람들이다’ 이런 거요. 재밌었어요.


-‘배달왕 잔나비’를 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김도형 : 그때 그 뜨거운 열정이 막 당장이라도 날아다닐 것 같은데 공연이 없는 날엔 분출할 방법이 없는 거예요. (웃음) 그럼 어떻게든 모두 나가서 뭐라도 하고 그랬죠. 그만큼 뜨거운 뭔가 있었던 것 같아요.

최정훈 : 공연없는 날은 우울했죠.


-기존에 밴드는 클럽에서만 공연을 한다는 이미지가 있는데, 잔나비는 개방적이었네요.

최정훈 : 그게 저희가 음악을 재밌게 할 수 있었던 힘이자 바탕이었던 것 같아요. 저희가 그런 부분에 있어선 자존심을 일찍이 조금 내려놨었어요. 자그마한 자존심을 챙기다가 나라는 사람이 파괴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뭐 어때, 나는 음악 하는 사람인데. 사람들한테 음악을 들려주고 싶은데 그게 내 음악이면 어떻고 다른 사람 음악이면 어때. 사람들이 좋아하면 됐지.’ 그런 생각을 먼저 했어요.


-가리는 게 없었네요.

최정훈 : 네. 그중에서도 독특했던 곳은 숲속이었어요.

김도형 : 숲속에서 했던 공연. (웃음)

최정훈 : 관객 수보다 제 발밑에 나방이 더 많았던 그런 숲속이었는데, 어느 사찰이었거든요. 무슨 축제였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지방에 있는 숲속에 들어가서 어느 사찰에서 공연을 했어요. 2017년 7, 8월쯤에. 결이 손가락 부러졌을 때요.


-그때 관객 구성은 어땠나요.

최정훈 : 저희 팬분들께 너무 감사한 게 그런 곳에 막 오세요. 같이 공연 즐기고 저희 응원해주신다고 오는 거예요. 거긴 정말 밤 되면 차가 안 다니는 곳이었어요. 근데 거기까지 오셔서 구경하고... 저희가 초반에 뻘쭘해 하니까 팬분들이 분위기를 돋워주셨어요. 그럼 우린 또 그거에 재밌어서 하게 되고. 저희 팬분들 제외하면 아주머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었죠. 그럴 때 세트리스트가 바로 바뀌는 거예요. 자작곡 몇 개 빼고 김현식의‘골목길', 산울림 넣는 식으로. 내려가서 춤도 같이 춰드리고.


-예비 세트리스트가 많았겠어요.

김도형 : 맞아요. 공연이 만족스럽지 않은 날엔 엄청 자책했어요. 뭐가 문제일까, 앞으로 이런 상황이 왔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런 거요. 예를 들어 저희 부모님 세대가 많은 공연에서 흡족할 만한 호응이 나오지 않았다면, 그 대비책을 세워서 다음엔 비슷한 상황에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한 거예요.

최정훈 : 그럴 때 ‘이런 행사는 오지 말자’고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다음엔 우리가 조금 더 내려놓고 처음부터 이 곡을 하고 이상한 춤도 추면서 조금 낮춰서 가자, 이왕 하는 거 그래도 재미있게 하고 그분들께도 좋은 기억을 드리자’ 하는 얘기를 했죠.


-그 시기를 거치며 공연에 대한 내공이 많이 쌓였겠군요.

김도형 : 그래서 알게 모르게 저희가 임기응변에 꽤 강한 팀이 아닐까 해요. (웃음)

최정훈 : 임기응변뿐만이 아니라, 어느 날부터는 공연에서 분위기의 흐름을 어떻게 잡을지 보이더라고요. 그런 행사들은 난이도가 최상이에요. 가장 쉬운 건 다들 놀려고 온 페스티벌 같은 거죠. 너무 재미있게 저희도 가서 놀면 되니까요. 페스티벌은 가기 전날 유튜브로 우리가 좋아했던, 전설로 생각했던 오지 오스본 그런 영상을 봐요. 어릴 때부터 우리가 따라 하고 싶었던 제스처 같은 게 있잖아요. 영상을 보면서 ‘내일 이거 한다’ 하고 다음 날 무대에서 하고 그랬죠. (웃음)


-가장 힘들었던 무대는?

김도형 : 월드컵 때 새벽 경기였는데 저희가 대전에서 축하 무대에 올랐어요. 중간에 잠깐 짬을 내서 공연을 하고 다시 경기를 보는 식이었죠. 근데 그때 경기가 마음에 안 드셨는지 현장에 계시던 어르신들께서 약주를 양껏 드셨더라고요.

최정훈 : 축구를 새벽 5, 6시쯤 했는데 공연 스케줄을 전날 들었어요. 지금 가면 공연할 수 있다고 해서 저희는 급하게 막 준비해서 갔죠. 월드컵이니까 퀸의 ‘We Are The Champion’, ‘We Will Rock You’ 준비하고... 그거 부를 생각에 뿌듯한 거예요. 월드컵 응원하는 사람들 앞에서 퀸 노래를 부른다니 가슴이 부풀어 올라서 갔는데, 조금 열악했던 거죠. 그게 기억에 남는 최상의 난이도였어요. 결국 다 풀어내지 못하고 내려왔죠. (웃음)

김도형 : 일단 사람들이 다 취해 있어서. (웃음)


(잔나비 인터뷰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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