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인들이 말하는 유재하

유재하와 함께 했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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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하의 삶은 단막극처럼 짧았지만, 그가 남긴 음악은 끝나지 않는 영화와 같다. 세월이 흐를 수록 재평가되고, 지금의 우리 음악 안에서 살아 숨쉰다. 음악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유재하의 삶을, 그와 동시대에 인연을 맺었던 이들의 회고로 들여다 본다.



김형석이 만난 유재하

-1985년에 대학 입학을 했을 때 조용필 선배님이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노래를 발표했는데 작곡을 저희 학교 선배가 했어요. 그게 유재하였는데요. 나도 이런 음악 꼭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설같은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죠. 조용필의 위대한 탄생의 키보디스트고, 학교 축제 때 공연했던 이야기들, 그 형이 청음이 너무 좋아서 재즈도 한 번 듣고 치고.. 그런 이야기들 들으면서 재하 형 음악을 처음 접했죠. 제가 입학할 때 형은 졸업을 했을 때니까 가끔 학교에 놀러오면 인사드리고, 마치 록스타를 보듯이 두근댔던 기억이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팝이나 컨템퍼러리 연주하는 걸 교수님들이 제재를 많이 했어요. 클래식은 엄격하니까. 그런데 별종들이 몇 명 있는 거죠. 음악적인 재능 때문에 클래식을 선택했지만 정작 본인들이 표현하고 싶은 음악은 다양한 경우가 많이 있었으니까. 지금이야 실용음악과가 있으니까 그런 일이 많지 않지만 저희 때만 해도 음악을 하려면 정통 클래식을 배워야 했던 시기였어요. 그래서 재하형이 저희한테는 신세계 같은 이단아였죠. 그래서 재하형 이후 저를 비롯해서 작곡가 신재용 선배님, 정재형.. 이렇게 다양하게 나온 것 같아요.



김종진이 만난 유재하

-전태관씨하고 가장 친했던 친구에요. 아마 유치원,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동네 친구였구요. 그래서 음악하는 동료이면서 친구의 친구로 알게 된거죠. 학교에서 제일 가까운 집이었데요. 학교에서 점심시간에도 재하 집에 가서 밥도 먹고 올 정도인데 전교에서 제일 늦는 지각생이었대요. (웃음) 말도 느릿느릿하게 하고, 말수도 많지도 않아요. 그리고 이게 재하는 좀 멋돌이었어요. 그러니까… 옷을 잘 입었다라는 게 아니라 이소룡 영화에 심취를 해서 뭐 이소룡 흉내도 내고, 운동도 하고 의협심도 강했고, 진짜 주먹도 셌대요. 예전 성신여대 앞에 오락실들이 즐비했어요. 오락실 앞에는 펀치볼이 있었는데 재하는 늘 최고 점수를 기록을 해야 집에 들어갔어요.

-현식이 형이 같이 밴드 하자고 그럴 때 장기호 씨, 저 그리고 전태관이 있었어요. 현식이형이 키보드 누구 없냐고 했더니 장기호씨가 박성식이라고 있는데 얘가 기가 막힌 뮤지션인데 제대하려면 좀 남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좀 곤란한데, 이러니까 태관이가 딱 나섰어요.

“유재하라는 친구가 있는데 지금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서 키보드 쳐요. 이 친구가 워낙 좋은 팀에서 하니까 하자고 하면 할지 모르겠는데 얘기는 해볼께요” 재하가 아무래도 그 쪽 팀은 형님들하고 활동하니까 쉽지 않았겠죠. 저희는 동년배고 하니까 어, 할께 하면서 저희 팀에 온거죠. 우리 나이 또래가 프로 뮤지션도 아닌데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이잖아요. 조용필 형님한테 ‘사랑하기 때문에’도 드리고 이문세 형님한테도 ‘’그대와 영원히’도 드리고 하던 작곡가이자 키보드 연주자였으니까… 요즘 말로 역대급이죠. 한양대에서 클래식 작곡과하면서 저 친구 대중음악도 한다면서 학교에서도 좀 날렸다고 그러더라고요. 재하 지나가면 수근수근거리고.

-현식이형이 멤버들한테 곡좀 갖고 오라고 해서 악보로 한 곡씩 갖고 왔어요. 그런데 재하는 카세트 테이프에 왠만한 반주까지 녹음해서 열 곡을 갖고 온거에요. 딱 들었는데 막... 녹아 버릴 것 같았어. 너무 달달하고(웃음). 아, 음악을 이렇게 로맨틱하게 만들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이 딱 들었어요. 재하 얼굴이 실제로 보면 상남자 스타일이에요. 부리부리하고 말도 느리고 말수도 많지 않고. 그리고 또 싸움도 잘하던 친구거든요. 또 술을 좋아했어요. 그 어린 나이에 그렇게 술 좋아하기 쉽지 않은데. 고작해야 24~25살 때 방배동에 그 친구가 자주 가는 카페가 있었어요. 피아노가 있었거거든요. 그 친구 집안이 좋아서 친구들한테 늘 술을 사주는 입장이었어요. 저희는 500cc 맥주 한잔 놓고 깨작깨작하면 지팡이 들고 모자 쓴 아저씨 위스키(조니 워커) 시켜서 얼음 동동 띄우고…

피아노 치면서 노래하는 걸 엄청 좋아했어요. 자기가 노래 딱 불렀을 때 관객들이 오빠! 그런 거 있잫아요. 그걸 엄청 꿈꿨어. 우리가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 초기에 전국 순회 공연을 많이 다닐 때, 대구에 있는 대백 프라자같은데서 공연 하면 멤버 소개하거든요. 김현식씨가 “기타!” 하면 거꾸로 치고 이로 막 뜯고 그러는데 재하는 “키보드!”하면 막 키보드 위로 올라가서 발로 건반 건반 누르고…(웃음) 여하튼 수더분하고 굉장히 재미있는 친구였어요. 그러니 ‘어? 이 친구가 어떻게 이렇게 달달한 음악을 만들지?’ 한거죠. 곡을 만드는 걸 직접 본 적이 있거든요. 음악을 뚝딱 만들어요. 분명히 그 친구 침대 밑에 한 100곡 정도 악보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정말 천재적이었어요.

현식이형 3집에는 ‘가리워진 길’이 들어갔는데 그 곡이 어떤 곡이냐. 키보디스트 김광민씨가 버클리음대 유학 간다고 할 때 저랑 재하가 형을 -공항까지 태워다 줬어요. 형을 보내고 재하랑 저랑 이태원으로 오는 길에 재하가 이러더라고요. “어우, 나 가슴이 미어져. 나도 공부하러 가고 싶은데 (김광민) 형만 보내서 나는 너무 외로워” 그러면서 음악이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무슨 음악이냐고 했더니 노래하면서 “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는~” 멜로디와 노랫말이 같이 나오더라고요. 천재잖아요, 그냥. 제목은 가리워진 길이라고 하고. “ 나도 공부하러 가고 싶은데 진짜 갈 수 있을지 없을지 길이 안 보여” 막 그러면서. 우리는 이제 막 열심히 연습하고 연구해서 뛰고 싶어하는 놈이었다면 재하는 나는 놈이었어요. 뛰는 놈이었다면 거기는 나는 놈이었어요.

-레코딩할 때 많이 놀러갔어요. 기타도 치러 가고 했는데, 서울스튜디오에 최(세영) 사장님이라고 전설적인 엔지니어가 계세요. 우리나라의 명반을 많이 레코딩하고 믹싱 해주셨던 분인데 감당을 못하는 거에요. “아니, 이렇게 해도 되나?” 하면 재하가 “꼭 이렇게 해주세요” 하죠. 그럼 “아니, 이렇게 하면 틀에서 너무 벗어난 거 아닌가?” “그래도 이렇게 해주세요.” 이런 식이었죠. 게다가 그 친구가 직접 제작도 했으니 내 돈 내가 내 앨범 만드는 건데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주세요, 부탁을 했죠. 작사, 작곡, 편곡, 제작까지 혼자 다 한거에요.

-그거 아세요? 재하가 기타를 엄청 잘 쳤거든요. ‘지난 날’로 기억되는데요. “재하야 이거 니가 한 번 쳐봐” 그랬더니 기타 솔로를 딱 치는데 나보다 더 잘 치더라고요.(웃음) 그래서 결국 제 기타와 이펙터로 재하가 기타 친 거에요. 그 때는 래리 칼튼이나 리 리트너같은 외국 기타리스트 곡 카피하는 게 유행이었어요. 그런데 워낙 빨리 쳐서 그냥 들으면 어떻게 쳤는지 잘 안들리거든요. 그래서 카세트테이프로 돌려 듣고 하다가 잠들고, 다음 날 만나서 “야, 이거 이렇게 친 것 같아” 그러던 시절인데 다음 날 가면 재하는 딱 카피해서 온 거에요. 어떻게 한거냐고 했더니 “그냥 들으면 들려” 그러는데 손가락을 확 찢어 버리고 싶…(웃음)

-또 키보드는 아주 심플하게 치는 기술이 있었어요. 그래서 키보드를 잘 못 치는 줄 알았어요. 너무 간단하게 치는 거야. “야, 재하야. 너 그렇게만 쳐도 곡을 만들 수 있어?” 그랬더니 “이렇게 하려면 손가락이 좀 잘 돌아간 다음에 미니멀리즘으로 가면 더 좋게 들려” 그래요. “손가락 돌아가는 건 뭔데?” 물었죠. 그건 악보를 좀 봐야됀다고 하더니 악보를 펴서 피아노를 치는데 이야, 눈 앞에서 루빈스타인이 피아노를 연주하네?

-저는 뮤지션이 돈에 굴복하면 안된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어요. 재하는 반대로 “대중이 내 음악을 안 들어주면 존재 가치가 없는 것 아니냐”하면서 밤새 설전을 했죠. 라이오넬 리치의 ‘Hello’를 피아노로 치면서 “이거 얼마나 좋아. 사람들이 앨범 사주고 하니까 더 좋은 음악 또 만들 수 있고 무대 위에서 더 좋은 조명이랑 음향으로 사람들한테 들려줄 수 있는 거 아니야?” 하면 저는 “에이, 너무 대중적이고 상업적이네. 너무 설탕발림 아니야?” 하면 “아니야. 이거 진짜 좋아서 만든 것처럼 들리는데?” 그러는 거에요. 저의 외골수같았던, 순수지향적인 음악 세계도 마음을 열게 된거죠. 그래서 나중에 봄여름가을겨울이 활동할 때 재하의 영향이 가득 배어있게 됐어요. 저희도 그런 달달한 음악, 로맨틱한 음악을 할 수 있었죠.

-유재하가 30여년전에 발표한 그 앨범으로 한국 음악계에 새로운 요리법이 나온 거에요. 지금은 누구나 다 그 요리를 자연스럽게 먹고 있으니까 그 당시에도 당연히 즐겼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때로 돌아가면 이런거에요. ‘아니, 이게 뭐야? 이게 무슨 맛이지? 와! 이런 맛이 있을 수가!” 다들 그렇게 깜짝깜짝 놀랐죠. 조심스럽게 비유하자면 청국장, 김치찌개만 먹던 시대에도 유재하라는 쉐프가 나타나서 파인다이닝을 했다고 보면 되죠. 이렇게요. 10개의 노래가 있습니다. 전부 제가 작사, 작곡, 편곡을 했고 순서를 정했습니다.그래서 클래식 음악가들의 편곡법으로 연주도 넣어서 최고의 음질로 여러분께 들려드립니다. 순서대로 한번 들어보시죠, 딱딱딱딱. (웃음) 아마 그 친구가 계속 살아서 음악 활동할 수 있었다면 정말 다양한 음악을 선사할 수 있었을 거예요.


빛과 소금이 만난 유재하

-장기호: 김현식씨가 밴드를 같이 하자고 해서 전태관, 김종진, 그리고 제가 김현식 씨하고 만났어요. 그런데 건반 주자가 없었던 거죠. 전태관 씨가 자기 친구 중에 아주 다재다능한 친구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정원영 씨 동생, 유재하, 전태관이 동창이거든요. 오디션 한 번 보는 게 어떻겠냐 해서 경의대학교 밴드 연습실에서 만났어요.

종진이랑 나랑 태관이랑 악기 딱 풀고 기다렸죠. 우리는 유재하가 어떤 인물인지 기대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딱 들어오는데 전혀 음악할 것 같지 않은 이미지인거에요. 펑퍼짐한 점퍼 입고 악기를 잔뜰 들고 헉헉대면서 들어오더라고요. “아, 내가 재하인데” 그러는거에요. “야, 너 할 줄 아는 거 뭐야?” 그랬더니 “나 기타도 치고 피아노 치고 작곡도 하고 노래도 해.” 한 번 해보라고 했죠. 어유, 우리 앞에서 기타를 치는데, 제 느낌에 김종진씨보다 더 잘쳤어요. (웃음)

그러더니 피아노 앞에 딱 앉더니 “별 헤는 밤~ “ 이러면서 노래를 하는데(‘그대 내 품에’) 자기가 만든거라고 하는 거에요. 야, 그러면 우리 현식이 형한테 가자고 해서 만났죠. 현식이형이 너무 좋아하는 거에요. 우리가 연주자라는 사실보다는 작곡을 잘하니까 재하한테 기대를 많이 걸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김현식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처음에는 유재하, 저, 전태관, 김종진, 그리고 김현식 이렇게 다섯 명이 출발을 했죠.

그런데 (김현식 3집) 녹음하기 한 달 정도 전에 갑자기 팀을 그만두겠다고 했어요. 이유는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 조금씩 달라요.


-박성식: 제가 제일 정확하게 기억해요. 그 이전에 알아야 할게 김종진, 장기호, 저 이렇게 셋이서 해군 홍보단에서 같이 근무를 했어요. 그런데 제가 다섯 달 늦게 입대를 했어요. 다른 친구들은 다섯 달 먼저 제대를 해서 음악 활동을 하고 있었던 거죠. 나도 굉장히 하고 싶은데 군대에 있었으니 못 하는 거죠. 그래서 제대하면서 같이 하게 된 거에요. 그 때는 유재하, 박성식 둘이 건반을 했어요. 제가 9월에 제대했는데 12월에 유재하씨가 그만뒀어요. 자기 솔로 앨범을 계속 준비하고 있었고 녹음을 위해서 팀을 그만둬야했다고 해서 나가게 된거죠.


유영석이 말하는 유재하

-스치듯 한번 만난났어요. 87년 11월 1일인가 돌아가셨는데, 제가 1985년부터 서울 음반에 있었거든요. 현식이 형도 만났었어요. 그 때 갓 나온 유재하 선배님 앨범을 들려주더라고요. 원래 자켓은 달랐어요. 담배 연기 올라가는 그림이어서 금지가 되고 지금 자켓으로 바뀌었어요. 그거 듣고 ‘아, 내가 하고 싶은 걸 이 사람이 다 해 놨구나.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국 사람은 좀 애조 띄고 마이너 스케일의 흐름을 좋아한다는 공식이 있었는데 벗님들처럼 세련된 음악을 가지고 나온 분들에 의해 점점 깨져가는 시기였어요. 김광민 선배가 있던 동서남북, 권인하 선배가 있던 우리라는 팀도 있었고. 그런데 그걸 이제 총 정리하고 거기에 클래시컬함까지 합친 음악을 유재하 선배가 보여준거죠. 그때는 또 다들 혼자 악기 연주를 다 하는 원맨 밴드를 꿈꿨었거든요. 디지털이 없던 시절이니까. 그런데 그 어린 나이에 그걸 했다는 게 경악이죠.

유재하 선배님 음악을 듣고 저만 좌절한 게 아니었더라고요. (웃음)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함께 좌절하고 한동안 희망을 얻지 못하고 그냥, 좌절의 늪에 빠져서 그냥 그 음악에 허우적댔죠. 그렇게 일찍 가실 줄은 몰랐죠.


김현철이 말하는 유재하

-저는 유재하 씨는 한 번도 못봤어요. 1987년 11월 1일에 돌아가셨는데, 제가 1989년 8월 데뷔니까 뵐 수가 없었죠. 저는 유재하 선배를 못본 게 행운이라 생각해요. 우상으로 남아 있는 거니까요. 아무리 자기가 우상으로 삼더라도 그 사람과 친해지면 형으로, 선배로 대접하기 마련인데 유재하 선배는 저에게는 그냥 한 마디 말 없는 우상이잖아요. 제가 나중에 10주기 앨범을 프로듀싱했기 때문에 앨범을 말할 수 없이 많이 들었죠. 하지만 그 당시, 1987년 1988년 이 당시에는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가장 좋아했어요. ‘우울한 편지’나 ‘가리워진 길’보다도 더 아픈 얘기를 담고 있는 것 같아서. 누구는 밝은 음악이나 춤 출 수 있는 음악을 좋아하는 반면에 저는 행간이 있는 음악을 좋아하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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