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초 파동

기본내용[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금지곡의 잇따른 발표로 가요계가 어수선하던 1975년 12월 4일. 각 일간지 사회면에는 평소 문화면에서나 보아왔던 낯익은 얼굴과 이름이 큼지막하게 실렸다. ‘가수 윤형주, 이장희, 이종용 3명이 대마초를 피운 혐의로 12월 3일 구속되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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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2월 5일 김추자, 신중현이 습관성의약품관리법위반 혐의로 구속되고,

12월 6일엔 정훈희, 장현, 손학래, 임창제, 박인수, 김정호 등이 수배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한국 대중음악 흐름의 맥을 끊은 사건으로 기록된 ‘대마초 파동’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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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혀간 가수들은 다른 대마초 흡연자의 이름을 대라는 물고문 등을 참지 못하고 다른 가수의 이름을 대야 했다. 이수미, 김세환, 이태원, 박광수, 이현 등이 또 붙들려 들어갔다. 1976년 1월 29일 문화공보부 발표에 따르면 1월 20일까지 붙잡힌 대마초 관련 가수, 배우, 연주자 등 연예인은 모두 54명이었다.


이 가운데 윤형주, 이종용, 이장희, 신중현, 김추자 등 20명이 구속되고 장현, 이현 등 11명은 불구속,

정훈희, 이수미, 임희숙 등 10명은 훈방된 것으로 발표되었다.

직업별로는 가수 23명, 배우 3명, 코미디언 2명, 악사 26명 등이었다.

‘김추자·권용남·손학래 구속, 가수 박인수 수배’(6일치), ‘30여명 연예인 명단 입수… 정미하(배우) 구속, 남성듀엣 어니언스의 임창제 자수’(8일치), ‘가수 장현 자수’(9일치) ‘코메디언 이상해·이상한, 가수 정훈희·이수미 자수’(10일치), ‘가수 김세환 김정호 불구속 입건’(22일치). 76년 1월30일치 <조선일보>는 “75년 11월 26일부터 76년 1월20일 사이 대마초 관련 연예인은 모두 54명으로 구속 20명, 불구속 11명, 수용중 13명, 훈방 10명


이장희, 김추자, 임창제 등은 벌금형을, 신중현, 윤형주, 박광수 등은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수개월 후

풀려났지만 박정희 정권이 유지되는 동안은 금지된 노래를 부를 수도 없었고 방송에 출연할 수도 없었다.

한국의 가요사상 이렇게 많은 가수들이 한꺼번에 무대에서 쫓겨난 것은 처음이었다.


당시는 엄혹했던 유신정권 시절이라 대놓고 말은 못했지만 가수들도 할 말이 많았다.

당시 미 8군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연주를 했던 가수들은 소위 ‘해피 스모크’로 불렸던 대마초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대마초가 마약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1970년에 제정된 습관성의약품관리법에 대마초가 포함된 것도 몰랐고 실제 단속도 없었다. 그런데 이것이 새삼 문제가 되어 굴비 꿰듯 쇠고랑을 찬 것이다.


1975년 말부터 1976년까지 대대적인 대마초 단속으로 137명의 연예인들이 활동을 규제 받았다.


수개월 후 대마초 파동의 큰 물결은 지나간 듯했으나 쓰나미로 변한 대마초가 1~2년 동안 더 가요계를 휩쓸고 다녔다. 1976년 김도향에 이어 1977년 하남석, 이동원, 채은옥, 조용필 등도 수년 전에 피운 대마초 흡연을 이유로 철창 신세를 졌다.


4년의 시간이 흐르고 독재가 종언을 고한 1979년 12월이 되어서야 활동규제가 전면 해제됐다. 그러나 규제가 풀렸다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그 4년이란 망각의 시간이 동안 한국의 대중음악 지형은 크게 바뀐 것이다. 록과 포크로 대변되던 당시 청년음악의 열매와 가지는 물론 밑둥치까지 자른 이 ‘문화적 벌목’으로 대중음악계는 대마초 파동 이전과 이후로 뚜렷이 나뉘었다.


방송사들은 포크와 록 등 ‘청년들의 저항문화’의 대안으로 트로트 등 재래음악을 내보냈다. 또한 1980년대 초반은 템포 빠른 디스코와 댄스음악의 물결이 몰아닥쳤다. 도도한 기세로 진군하던 통기타와

록밴드의 울림은 대마초 파동으로 일거에 멈춰섰고, 대신 트로트, 스탠더드 팝 등 복고가 되살아났다.

대마초 파동 관련 기사[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❶ 대마초 파동 당시 사회 흐름[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대마초 파동 30년 청년문화 ‘해피스모크’ 에 데다 (2005.11.30.)


그해 겨울, 거짓말처럼 스타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대마초를 쉽게 피던 시절, ‘언제부터 단속하겠다’는 한마디 경고나 예고도 없이 수사당국은 ‘대마초 단속’을 시작해 50명이 넘는 가수·연주자·작곡가들을 잡아들였고 풀어준 뒤에도 활동금지령을 내렸다. 서양음악의 단순 번안을 넘어선 한국 팝이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직후였다. 만개를 앞두고 있던 그 꽃은 ‘퇴폐’라는 이름으로 뿌리째 잘려나갔다. 대통령 영구 집권을 위한 ‘10월 유신’이 선포됐고 반대자들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붙잡혀가던 때였다. 정확히 30년전, 75년 12월 3일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이장희·신중현·윤형주·김추자….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던 음악인들을 굴비 꿰듯 엮어 넣어 훗날 ‘자유로운 청년 문화를 풍비박산 낸 일격’, ‘대중음악 발전의 맥을 끊은 사건’으로 기록된 1975년 12월 ‘대마초 파동’은 당하는 처지에선 난 데 없는 홍두깨였다.


요즘과는 달리 당시만 해도 ‘해피스모우크’라고 불렸던 대마초는 그들에게 길거리고 다방에서고 나눠 피우는 소일거리 정도였다고 한다. 이 파동으로 구속됐던 박광수(65·‘신중현과 더 맨’의 전 보컬)는 이렇게 말한다. “1960년대 후반부터 길바닥에 앉아서도 피웠어. 한번도 단속당한 적 없지. 그게 ‘망국적 연기’일지 누가 알았겠소. ‘소주 한잔 하자’랑 비슷하게 여겼는걸. 죄의식을 가질 이유가 없었던 거지.” 196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날아든 히피 청년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은 신중현(67)은 그 친구들에게 밥·술 사준 보답으로 대마초를 받았다. “한창 사이키델릭 음악이 유행이어서 알아보려고 68년께 6개월 정도 해봤지. 별 재미없어 끊었어. 나중에 후배들이 ‘대마초 가진 거 있어요’라고 물으면 ‘우리 집에 산처럼 있다’ 그랬지.” 그때까지 대마초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건 음악인들만은 아닌 듯하다. 1970년에 제정된 습관성의약품관리법엔 대마초 흡연을 규제하는 조항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 단속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1975년 12월3일치 <동아일보>는 사회면에 큼지막하게 ‘해피스모우크 흡연자 첫 구속’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대마초 단속은 이 파동을 시작으로 1976년 4월 대마관리법이 제정되면서 본격화됐다.


방망이질은 살벌했다. 75년 12월3일 ‘그건 너’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이장희를 비롯해 윤형주·이종용이 습관성의약품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다음 날 저녁 신중현은 반포아파트 자신의 집에 죽치고 있던 수사관들과 맞닥뜨렸다. 하루 뒤 그는 서울 중구 남장동 여성문화회관 지하로 끌려갔다. “누구랑 같이 피웠냐고 그래서 사실대로 말했어. 예전에 히피애들, 조지, 마이클, 닉…. 그랬더니 미국 사람은 안 된대. 매달아서 물에 넣는 거야. 죽겠다 싶어서 불러주는 대로 ‘맞다 맞다’ 그랬지.” 이날 저녁 7시께 박광수도 여성문화회관 지하행을 탔다. “뉴스에서 대마초 이야기가 계속 나와. 서울 명동에 있던 로얄나이트클럽에 일하러 들어섰는데 장정 3명이 엘리베이터 안에 밀어 넣고 뒤지는 거야.” 그도 고문을 당했고 그 이야기는 6일치 <동아일보>에 “‘해피스모우크 흡연 자백하라’ 마약단속원이 폭행”이란 제목으로 보도됐다.


신문들은 연일 숨 가쁘게 대마초 관련 소식을 전했다. ‘김추자·권용남·손학래 구속, 가수 박인수 수배’(6일치), ‘30여명 연예인 명단 입수… 정미하(배우) 구속, 남성듀엣 어니언스의 임창제 자수’(8일치), ‘가수 장현 자수’(9일치) ‘코메디언 이상해·이상한, 가수 정훈희·이수미 자수’(10일치), ‘가수 김세환 김정호 불구속 입건’(22일치). 76년 1월30일치 <조선일보>는 “75년 11월 26일부터 76년 1월20일 사이 대마초 관련 연예인은 모두 54명으로 구속 20명, 불구속 11명, 수용중 13명, 훈방 10명”라며 “그 가운데 가수는 23명, 배우 3명, 코디미언 2명, 악사 26명”이라고 보도했다. 그물망에 잡힌 건 연예인 뿐만이 아니었다. 23일 서울지검은 “지난달 27일부터 30일까지 밀매조직 12개파 가운데 5개파 35명과 흡연자 101명 등 모두 136명을 적발해 이중 65명을 구속, 22명은 불구속, 13명은 정신병원 등에 수용, 나머지 32명은 훈방조처했다”고 밝혔다.


수사 휘몰이는 잦아든 듯했지만 잡혀 들어간 사람들의 고초는 여전히 호됐다. 서대문정신병원에서 신중현이 보낸 1주일은 이렇다. “처음엔 독방에 있다가 나중엔 정신질환자들과 같이 놀았어. 사방이 창살이고. ‘이렇게 미치게 하려는구나’ 생각했지.” “고문받은 뒤 정신병원에서 한달동안 갇혀있었다”는 기타리스트 강근식(59)은 이렇게 기억한다. “감독, 가수, 디스크자키…. 30여명 같이 있었어. 밖으로 연락도 안됐지. 불안했지만 아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래도 재밌던걸.”


벌금 내고 풀려난 강근식과 달리 구속기소된 사람들은 서대문구치소로 옮겨졌다. 신중현은 “넉달 동안 도둑들하고 같이 있었다”고 했다. “하루 종일 도둑질한 이야기만 들었어. 레파토리 끝나면 다시 처음부터 똑같이 낱말하나 안 바꾸고 말해. 어찌나 지겨운지….”


12월23일 이장희·김추자 등은 벌금형을, 그 다음해 3월께 신중현·박광수·윤형주 등은 징역1년~1년6월에 집행유예 2년으로 풀려났다. 벌의 경중을 떠나 박정희 정권이 끝날 때까지 이후 4년 동안 그들은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자수해서 벌금만 냈던 ‘어니언스’의 임창제(59)는 이렇게 말했다. “방송이고 공연이고 다 금지야. 나이트클럽에서도 안 받아줘. 받아줘도 출연료가 그전에 반 토막이야. 먹고 살기 힘들어서 정신 없었지.” 박광수는 “그 뒤로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 그만두고 고향에서 살려고 했는데 거기서도 폐인 취급이던걸. 대마초꾼으로 찍힌 거지.”


‘대마초 파동’의 큰 푸닥거리는 지나갔다. 그 잔물결은 멈추지 않았다. 76년엔 김도향이, 77년엔 하남석·이동원·채은옥·조용필 등이 대마초 탓에 곤욕을 치렀다. 금지곡이 너무 많아 방송사 피디들마저 “틀 곡이 없다 갈팡질팡”(<일간스포츠> 75년 12월26일치)하던 사이 빈 자리는 흘러간 옛 노래들이 메웠다.

❷ 강력한 탄압에 강제 퇴장당한 청년문화, 4년간 변화한 한국의 대중음악 지형[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대중음악SOUND 3호/2011년] 커버스토리 “한국 대중음악 100년” (2018.02.28.)

대마초 파동 (1975) - 한국 대중음악계의 최대 암흑기

“해피스모우크 상습흡연 혐의, 이장희 윤형주 이종용 등 연예인 3명 구속 - 이번 구속된 가수 이장희 씨의 경우 73년 10월 마산에 공연 갔다가 무대 뒤에서 장난삼아… 최근 젊은이들 간에 해피스모우크담배 흡연이 유행하는 것은 ‘미국 히피문화(?)의 상륙이라고 볼 수 있다’는 사람들도 있다…” (동아일보 1975년 12월 4일자)


1975년은 정치적 측면은 물론이고 사회문화적으로도 가장 혹독했던 시기로 기억된다. 그해 5월 13일 “헌법에 대한 일체의 비판이나 반대 논의를 금지한다”는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된 것이 대표적이다. 독재체제가 강화되면서 그 후폭풍은 가요계에도 시차 없이 불어 닥쳤다. 그해 6월에는 ‘1차 가요정화운동’이 벌어지며 히트곡 대부분이 금지곡 목록에 오른다. 당시 라디오(0시의 다이얼) DJ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이장희의 히트곡 <그건 너>는 남에게 책임을 전가시킨다고, <불꺼진 창>은 남녀의 불륜을 암시한다는 허무맹랑한 이유가 나붙었다. 신중현의 노래는 그 한 해에만 무려 17곡이 금지됐다. 이 리스트는 이후 가요계를 옥좨는 ‘전가의 보도(寶刀)’가 된다. 그해 연말에는 금지곡을 수록했다는 이유로 10개 음반사 가운데 7개사에 영업정지 처분이 내려질 정도였다.


‘가요정화운동’은 문화탄압의 서막에 불과했다. 12월 3일 가수 윤형주, 이장희, 이종용 등이 대마초(마리화나) 흡연 혐의로 구속된 것이다. 당시 ‘세시봉’ 같은 음악감상실을 중심으로 음악적 역량을 표출해온 새 시대의 주인들은 방송시대의 도래와 함께 최고의 청춘스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런 ‘청년문화’ ‘포크문화’ ‘저항문화’의 상징들이 순식간에 퇴폐문화의 상징이자 사회적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탄압은 이듬해도 계속됐다. 가수 신중현, 김세환, 김도향, 김추자, 정훈희, 임창제 등이 차례차례 검찰에 구속되거나 불구속 입건됐다. 이 같은 단속으로 약 137명의 연예인들이 활동을 규제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마초 흡연은 망국적 행위”이며 “이들에게는 현행법상 최고형을 적용, 엄벌하라”는 지시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들 연예인 가운데 영화인이나 코메디언도 적지 않았지만 가장 큰 피해는 역시 가요계였다. 이들은 사법처벌로 끝난 것이 아니라 ‘방송금지’는 물론이고 밤무대에도 설수 없게끔 강력한 탄압이 뒤따랐다. 가수가 무대에 설 수 없는 없다는 얘기는 ‘사회적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신중현씨는 한 인터뷰에서 “1976~79년에는 뭐든지 하지 말라고 했어. 앨범도 못 내고 녹음 연주도 안 돼. 항상 사람이 따라붙었어, 악기며 집 다 팔고 셋방살이 했어… 온통 절벽이었다”고 회고했다. 어떤 이들은 고문과 협박으로 음악을 포기하기도 하고 어떤 가수들은 아예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도 했다.


이들은 4년의 시간이 흐르고 독재가 종언을 고한 1979년 12월이 되어서야 활동규제가 전면 해제됐다. 그러나 규제가 풀렸다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그 4년이란 망각의 시간이 동안 한국의 대중음악 지형은 크게 바뀐 것이다. 방송사들은 포크와 록 등 ‘청년들의 저항문화’의 대안으로 트로트 등 재래음악을 내보냈다. 또한 1980년대 초반은 템포 빠른 디스코와 댄스음악의 물결이 몰아닥쳤다.


‘대마초 파동’이 가요계에 남긴 상처는 상상 이상이었다. 청년음악의 아이콘들이 ‘마약’라는 낙인과 함께 강제 퇴장당하자 ‘중세시대’와 같은 암흑기가 찾아온 것이다. 무엇보다 1970년대 ‘세시봉’으로 대표되는 대중음악의 성과가 전면 부정됐다는 아픔이 컸다. 서구의 팝 음악을 번안해 부르던 1960년대와 달리 1970년대 한국의 ‘청년문화’는 정치적 억압 속에도 ‘반전’과 ‘저항’이라는 세계사적인 문화의

흐름과 보조를 함께하며 자유로운 문화적 감수성을 분출했기 때문이다. 이장희의 <그건 너>,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 송창식의 <왜 불러>, 김민기의 <아침이슬> 등 히트곡들은 상업적 성공과 함께 ‘한국 팝’의 가능성을 알린 문화사적인 사건이었다. 장르도 다양해 소울, 사이키델리 록, 포크 등이 만개하며 한국대중가요의 밝은 미래를 암시하고 있었지만 순식간에 강제진압당하며 자취를 감춘 것이다.

❸ 연예인에게만 적용된 대마초 파동/대마관리법이 제정되기 까지[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무죄’였던 대마초, 박정희 정부 ‘중형’···세계는 합법화 추세 (2017.06.11.)

■ 한국인의 대마포비아

1970년대 고등학생들은 “대마초 피웠다”라는 말을 은어로 사용했다고 한다. 무슨 뜻이었을까? 다름 아닌 예비고사에 낙방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친구를 지칭할 때 쓰는 말이었다(경향신문, ‘고교생 은어의 세계 8’, 1978·8·30). 대마초를 피우는 것과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일에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의아해하겠지만 이러한 은어가 만들어진 배경엔 1975년 연예인 ‘대마초 파동’이 있었다.


당시 최고의 스타들이었던 윤형주, 이장희, 이종용, 신중현, 김추자, 이상해 등이 대마초 사용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구속되어 TV에서 깨끗이 사라져버렸다. 이들은 생계를 위한 밤무대에도 서지 못했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지금 가요차트 1위에서 10위의 가수들이 모두 스캔들에 연루되어 출연정지를 당해 수년 동안 나오지 못한다고 상상하면 되겠다. 이용우는 이를 두고 “문화적 벌목”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한겨레신문, ‘일순 연기처럼 사라진 통기타·록 울림’, 2005·11·30). 인기가수들이 없어지니 PD들은 당장 출연시킬 가수를 찾지 못하는 곤란을 겪었다.


이 사건의 범법행위에 대한 처벌 정도는 다소 과하다고 할 수 있다. 대마초를 피우는 행위가 연예인으로서의 모든 활동을 수년간 정지할 정도로 중한 범죄는 아니다. 상식적으로 중한 벌은 공급책이 받아야 한다. 실제로 해당 연예인들은 마치 구속될 것처럼 보였으나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반성문을 썼다. 이영미는 이 과잉된 포즈를 1975년 전반의 분위기와 연관지어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한다(이영미, ‘대마초 사건 그 화려한 쓰리쿠션’, 인물과사상 2016·7). 동시간 베트남 공산화로 인한 위기감 고조와 1975년 동아일보 언론탄압, 긴급조치 9호, 대학의 총학생회 해체 등으로 이어지는 정국의 ‘위기상황’이 배면에 깔려 있는 상황에서, 미국 문화에 물든 청년세대가 까불면 이렇게 사라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 사건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대마초를 피운 주체는 회사원, 교수, 외국인, 사업가 등 다양했지만 언론은 ‘대마초 ○○○’이란 말을 오로지 연예인에게만 적용해 사용했다. 이 점에서 주기적인 연예인 ‘대마초 파동’은 통상적인 징벌행위로 보기 어렵다. 스타가 수갑을 찬 범죄자로 전락하는 장면은 대중을 향한 쇼크기법을 염두에 둔 연출이었다.


1975년 대마초 파동 이후, ‘대마초=사회적 지위 박탈’이라는 등식은 한국인의 뇌리에 오래도록 각인된다. 그리고 정권은 연예인들을 완전히 길들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재기 공연은 공연장이 아니라 교도소에서 열렸고(동아일보, ‘조용한 새 출발, 대마초 연예인들’, 1978·4·1), 연예인들이 국가에 봉사하자는 취지로 만든 새마음봉사대 공연에는 대마초 사건 연루 연예인들이 기꺼이 출연하려 노력했다(매일경제, ‘연예인 새마음봉사대 장병 위문공연, “사회에 보탬이 되는 연예인이 되자”’, 1979·8·6)


한국에서 연예인의 대마초 사건은 근면한 인간과 방탕한 인간을 구분해 도덕적 힐난을 연습하는 훈련장으로 기능한다. 김성환은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마약 단속을 “마약에 빠져 일을 하지 않는 게으른 중독자들을” “신성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국민으로 개조”하려는 기획이었다고 평가한다(청년문화를 제압한 ‘대마초 파동’, <1970 박정희 모더니즘>, 천년의상상). 올바른 국민이 되는 길은, 자주·자립·협동을 통한 근면 정직의 윤리를 세우는 것이고, 마약 문제 해결은 정의 구현의 길이었다.


■ 대마초는 죄가 없다

불과 47년 전인 1970년만 해도, 대마초가 이 땅에서 금지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점을 우리는 잊곤 한다. 대마초는 농촌의 상비약으로 누구나 조금씩은 복용하는 약재였다. 재미있어 즐긴 것도 아니고 단지 담뱃값이 아까워 대마잎을 대체재로 삼아 피는 수준이었다. 대마는 평범하고 가난한 풍경 속에 놓여 삶과 공존하고 있었다.


신문지상에서 대마초가 사회적 문제가 되어 등장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다. 한국 대마의 환각제 가능성을 알아차린 자들은 미군들이었다. 그들은 대마를 ‘해피 스모크’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해피 스모크’는 주로 ‘파고다’나 ‘아리랑’ 등의 담배에 대마가루를 첨가해 만들어졌다. 약학박사 이창기는 한국 대마엔 환각 성분인 테트라 하이드로 카나비놀(THC)이 인도, 스페인, 남아프리카공화국, 브라질 등 외국산 대마보다 훨씬 높다고 분석했다. 한국 대마는 환각을 위한 흡연으로서 상당한 효능을 가졌기에 미군부대 주변을 중심으로 빠르게 번져 나갔다. 당시 대마는 농가 삼베 재료로 재배되었으나 한국인들은 그것을 환각제로 사용할 줄 몰랐다. 그러던 차에 기지촌을 중심으로 대마초 흡연자들이 늘어나 점차 한국 젊은이들마저 사용하게 된 것이다. 1970년 법규에 이에 대한 규제 사항이 없어 단속을 하지 못했다. 어차피 대마 열매가 성숙하기 10여일 전에만 잠시 THC 성분이 생길 뿐이라고 판단한 관리들은 농촌에서 어망, 로프, 옷감 등을 만들기 위해 재배한 대마를 강하게 단속하긴 어렵다고 보았다.


반면 주한미군의 마약 관련 범죄는 늘었다. 대체로 대마초 자체의 환각 때문은 아니었고 대마초를 사기 위해 돈을 훔치거나 시비 붙는 일 등에서 발생했다. 주한미군은 이러한 사태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어 한국 정부에 적극 개입하기를 주문하게 된다. 미군 병사들의 마약사범이 지난 3년 동안 약 80배로 늘어나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 마약류단속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1970년 6월17일 보건사회부에 공문을 보냈다. 내용은 병사들의 마약범죄 대부분이 한국에서 재배되고 있는 대마 때문에 벌어지고 있으니, 이를 단속할 수 있는 법률을 제정하여 미군 병사들의 탈선을 막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매일경제, ‘대마류 단속 입법을 미군 측서 요청’, 1970·6·19).


이후 습관성 의약품 관리법이 1970년 10월16일 발효되었다. 화학적 구분으로 테트라 하이드로 카나비놀이 습관성 의약품으로 명시되었다. 1976년 3월에는 영리 목적으로 대마초를 소지했거나 상습적으로 대마초를 섭취한 사람에게 최고 사형까지 가능한 법안이 발의되었고, 같은 해 4월엔 대마를 습관성 의약품의 범주에서 분리해 통제할 수 있는 대마관리법이 제정되었다.

❹ 대마초 파동 그 이후 / 독재정권의 가시였던 청년들의 자유[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75년 ‘대마초 파동’…톱스타들 줄줄이 구속…박정희 전 대통령

“최고형 엄벌하라” 지시 (2010.12.04.)

연예계 ‘대마초 파동’|② 대마초 연예인 79년 활동 재개

1975년 말부터 1976년까지 대대적인 대마초 단속으로 137명의 연예인들이 활동을 규제받았다. 이들은 방송은 물론 일반 업소무대에도 서지 못해 다른 생계수단을 찾아나섰다. 무대에 설 수 없다는 것은 연예인에게는 ‘사회적 사형선고’였다. 코미디언 이상한처럼 그 충격으로 이민을 떠난 사람도 있었다.


활동 규제 해제 움직임은 그로부터 3년 뒤 시작됐다. 동료 연예인들은 문화공보부 등 당국에 ‘대마초 연예인’에 대한 활동 규제 해제를 탄원했다. 해당 연예인들은 군부대와 교도소, 불우이웃 돕기 자선무대 등을 열며 ‘자숙’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 결과 1978년 2월부터 방송을 제외한 야간업소 등 일반 무대 활동이 제한적으로 허용됐다.


1978년 12월27일 김대중, 시인 김지하 등 이른바 긴급조치 위반자 106명을 포함, 모두 5378명에 대한 대사면이 단행했지만 대마초 연예인들은 여전히 예외였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각계의 탄원도 끊이지 않았다.


1979년 오늘, 마침내 활동 규제가 전면 해제됐다. 한국연예협회 등은 3일 전, 문화공보부의 통보에 따라 137명 가운데 실형을 선고받은 14명의 무명 연예인을 제외하고 이날부터 활동을 전면 허용했다. 이들의 발이 묶였던 4년 사이에 가요계를 비롯한 연예계의 분위기는 바뀌어 있었다. 1970년대 초반 이후 청년문화를 상징하며 인기를 누렸던 이들은 더 이상 대중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1970년대에 들어 권력의 대중문화, 특히 ‘퇴폐’와 ‘저속’ ‘무분별한 외래문화 추종’ 등의 이유를 내걸은 대중가요에 대한 탄압이 계속됐다. 이들은 트로트가 장악했던 가요계에서 미국식 팝과 포크의 영향을 강하게 받긴 했지만, 통기타로 상징되는 청년문화의 최전선을 형성하며 젊은층의 지지를 받았다. 젊은이들은 정치적 억압 속에서 분출구를 찾을 수 없었고 그런 그들의 감성에 좀 더 자유롭고, 좀 더 다양한 음악적 기운이야말로 자유에 대한 열망을 키워주는 정서적 자양분이 되었다.


정권의 눈에 이 같은 자양분은 뿌리 뽑아야 하는 가시였다. “국민총화”라는 허울로 독재에 맞서지 못하게 하고 비판의 싹을 제거하고 싶었던 권력의 시선에서 이들 연예인들은 그저 ‘불온과 퇴폐의 온상’에 불과했다. 대마초 파동은 그 싹을 자를 수 있는 최적의 계기였다.


4년이라는 긴 시간, 노래할 수도, 연기할 수도, 대중에게 다가갈 수도 없었던 사람들. 그들의 ‘불법적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추방과 단속의 밑바닥에 권력의 ‘불온한 시각’이 전제되어 있었다.


이들에게 새겨진 ‘주홍글씨’는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지금도 이들의 이름은 안타까운 대중문화사의 한 페이지에 또렷하게 기록되어 있다.

❺ 만약 대마초 파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면[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그때 그들이 갇히지 않았다면… (2005.12.05.)

대중음악계, 대마초 파동 30년 맞아 ‘과거사 돌아보기’ 활발

1975년 12월, 당대를 주름잡던 인기 가수들을 줄줄이 감옥으로 몰아댄 경천동지의 대마초 사건이 터진 지 올해로 정확히 30년을 맞았다. 대마초 파동은 한국의 현대 가요사가 이 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전과 후로 나뉜다는 평가가 말해주듯 그 자체로 역사적이다. 이 사건을 실제로 경험했거나 나중에 들은 후대 사람들은 모두가 ‘만약 이 사건이 터지지 않았다면 우리 대중 음악의 흐름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진다.


분명한 것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이장희 윤형주 이종용 신중현 등이 대마초 흡연으로 구속되면서 그들의 퇴각과 함께 당대에 융성하던 포크와 록이 철퇴를 맞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포크와 록은 딴 장르들에 비해서 ‘리얼리즘’ 전통이 강한 음악, 즉 현실 왜곡과 부조리를 올곧게 지적하고 비판하는 성격을 지닌 음악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대마초 파동 이후 우리 가요에는 사실성과 사회 의식은 거세된 채 낭만과 오락성만이 부각되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로 인해 한국 대중 음악의 무게감이 현저히 떨어졌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음악 관계자들은 대마초 사건으로 록과 포크의 흐름이 끊기지 않았다면 가요는 훨씬 콘텐츠가 풍부해지고 오락성과 사실성 사이의 밸런스를 유지했을 것으로 분석한다. 심지어 근래 가요가 과잉 상업성의 나락에 빠져있고 한두 장르에 갇혀 있는 질곡의 근본 원인을 30년 전의 대마초파동에서 찾는 사람들도 있다.


대표곡
우리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