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요 Original

노브레인 인터뷰 (1부)

막다른 골목으로 질주하던 청춘들


인터뷰중인 노브레인

노브레인의 90년대는 질풍의 시기였다. 펑크의 아이콘이기도 했지만, 그로 인해 스스로 풍찬노숙의 길을 걷기도 했다. 원년 멤버의 탈퇴로 고난의 행군도 겪었다. 이제는 '중견 밴드'라 해도 어색하지 않은 그들이 초창기 인디신을 되돌아봤다. 노브레인의 결성부터 펑크 클럽 드럭의 문화, 그리고 세기말 홍대앞의 풍경까지 거침없이 털어 놓았다.



-처음 음악을 시작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정민준 : 어릴 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뭘까, 제일 잘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해 봤는데 음악 말고는 없었어요. 그래서 음악을 하게 됐어요. 전 노브레인의 원년 멤버는 아니고, 노브레인 같은 밴드를 하고 싶어서 고등학교 때부터 매일 노브레인 공연장을 찾아갔어요. 그러다가 눈에 띄어서 ‘쟨 뭔데 매일 오지?’ 소리를 들었죠. (이)성우 형이 그때 입장료 받았거든요. 당시 입장료가 5,000원이었어요. 1996년, 1998년쯤인데, 입장료 5,000원에 노브레인, 크라잉넛, 18크럭, (싱어송라이터 이지형이 몸담았던) 위퍼라는 밴드도 있었고... 여러 팀이 있었는데 5,000원에 그 네다섯 팀 공연을 보는 게 ‘꿀’이잖아요. 그래서 독서실 간다고 하고 매일 갔어요.

이성우 : 일주일에 한 세 번, 네 번 온 적도 있어요. 저희가 그때 일주일에 목, 금, 토, 일 이렇게 공연을 했는데 매일, 그것도 얘가 그때 고3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사장님이 “너 그만 와 인마! 가서 공부해!” 하고 혼을 내고, 입장료 깎아 달라고 했다가 또 혼나고 그랬어요.

정민준 : 너무 행복하게 매일 갔더니 사장님이 이제 그만 오라고 했었죠. 그럴 때 성우 형이 뒷문으로 공짜로 넣어주고 예뻐해 주셨어요. 어느 날은 공연을 늦게까지 한 날 차가 끊겨서 집에 못 가게 됐는데, 성우 형이 그냥 형네서 자자고 해서 형 집에서 많은 얘기를 나누고... 그러다가 인연이 시작된 것 같아요. 그러다 제가 존경하는 원년 멤버 차승우 형이 노브레인을 그만두면서 옆에서 지켜보던 제가 새로 들어올 기타리스트들을 보는데 개인적으론 너무 아쉬운 거예요. 다들 잘하는 친구들이었지만 노브레인에선 넘치는 테크닉보다 좀 망가질 줄도 알고, 땅에 떨어진 귤도 먹을 줄 알고 그런 상태여야만 했거든요. 전 그걸 잘 했어요. 그래서 제가 하겠다고 해서 맞춰보다가 함께 하게 됐죠. 한 15년 된 것 같네요.

이성우 : (웃음) 언제인지도 이제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정민준 : 원래 노브레인은 성우 형이 노란 머리만 하고 지나가도 경찰분들이 “너 이리 와봐, 뭐 하는 놈이야?” 하고 불심검문을 받고 그랬죠. 노브레인 시즌 1은 그렇게 저항의 열정이 완전히 폭발하던 시기였고, 제가 들어간 노브레인 시즌2는 저항도 좋고 다 좋다, 그런데 인생은 짧잖아. 우리 뭘 해도 재미있게 한 번 해보자, 하고 조금 더 잔치, 파티 같은 음악이 된 것 같아요. 그러면서 반항, 저항이란 키워드보다 열정, 젊음이란 키워드로 우리가 하고 싶은 걸 많이 즐기면서 냈죠.


-그럼 원래 기타를 치셨던 건가요?

정민준 : 노브레인 보면서 기타를 시작했고, 차승우 형한테 찾아가서 이것저것 많이 가르쳐 달라고 하면서 배우기도 했죠.


-팬에서 멤버가 되었다는 게 신기하네요.

정민준 : 저는 아직도 노브레인 팬이에요. 팬이자 멤버입니다.

이성우 : 저희가 처음 음악을 하던 때, 뭐 지금도 그렇지만 공연할 때 팬들과 거리감이 별로 없었어요. 거리감이 너무 없어서 엉망진창이 될 때가 많았는데, 그때 서로 격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지금도 저희는 공연할 때 ‘무대는 우리만 만드는 게 아니라 관객들과 함께 만든다’는 생각을 하고 무대에 올라가거든요. 그때는 더 그랬어요. 그래서 팬 중에 실제로도 가까운 친구들도 많았고, 저희에게 직접적으로 ‘이번 거 정말 구리다’, ‘정말 별로다’ 그런 얘기를 하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웃음) 지금은 인터넷에서 수많은 댓글로 반응하고 SNS로 연락도 취할 수 있지만 그땐 직접 1:1로 대면해서 많은 대화를 나눴죠. 가끔 관객들이랑 논쟁도 하고... 그러던 친구 중 한 명이었어요.


-그렇지만 팬이라고 아무나 멤버로 영입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정민준 씨를 멤버로 받은 결정적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이성우 : 기타를 정말 잘 쳤어요. 이 친구는 시간이 지나면 어마어마한 잠재력이 더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죠. 차승우가 나가고 난 후에 저희가 또 다른 색깔을 입히기엔 보보 같은 친구 말곤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많이 졸랐어요. 같이 좀 하자고.

황현성 : 그때 그냥 팬이었다가 쓱 들어온 게 아니고, 사실 밴드를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아마 형이랑 같이 프로젝트도 하고 있었고.

이성우 : 프로젝트 밴드 이름을 차마 말할 수가 없었네요. ‘리얼쌍놈스’여서요. (웃음)

정민준 : 제가 노브레인 하기 전에 했던 팀 이름은 ‘삼청교육대’입니다. (웃음) 이름들이 어떻게 하다 그랬는지...

황현성 : 사실 차승우가 나갈 때 우리 팀은 죽은 거나 다름없었거든요. 저희 밴드의 색깔을 정말 많이 만들던, 굉장히 중요한 핵심 멤버였으니까요. 그래서 차승우가 나가고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게 민준이었어요. 이미 밴드를 하고 있어서 함부로 접근하기가 힘들었는데, 서로 시간을 좀 가지면서 결정을 했죠.

이성우 : 우리에겐 어떻게 보면 또 다른 백신 같은 거였죠. 구세주라고 해야 할까요. 예전 노브레인 좋아하는 친구 중에 보보의 플레이나 송라이팅에 대해 예전과 비교를 많이 하거든요. 근데 전 보보의 연주가 너무 좋아요.

정민준 : 차승우 형이 노브레인의 기타 사운드로 중심을 잡았다면, 저는 성우 형이 더 돋보였으면 좋겠다는 기타를 연주했어요. 저는 둘 다 좋아요.


-어쨌든 노브레인 전부터 밴드도 하고 기타도 계속 연주하셨단 거군요.

정민준 : 그렇죠. 노브레인 공연을 꾸준히 다니고 밴드의 꿈을 키우면서 제 개인적인 밴드 활동을 하곤 했어요. 그중 한 팀이 아까 말했던 삼청교육대고요. 리얼쌍놈스는 차승우형이 군대 가면서 노브레인이 잠깐 쉬고 있을 때 성우 형이 제게 “야 심심한데 우리 사이드 프로젝트 밴드나 할까?”하고 만든 거예요. 당시 놀고 있던 인재들을 모았죠. 베이스는 노브레인에서 원래 베이스 치던 정재환 형이었고, 투 보컬 중 한 명은 신우석 형이라고 바세린이라는 밴드의 보컬이었고, 드럼은 무시무시하게 머리 돌리면서 드럼 치던 대한민국 최고의 파워풀 드러머 박재륜, 씨드라는 밴드의 박재륜 형이었어요. 1999년이었어요. 노래 들어보면 가사가 뭐라고 하는지 아무도 몰라요. 근데 그 당시에는 그런 밴드들이 없다보니 신기하고 재밌다고 대학교 축제를 엄청 돌았죠. 그럼 친구들이 막 좋다고 무대 위에 올라오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이성우 : ‘아빠의 청춘’으로 검색하시면 저희의 그런 목소리와 보보의 미친 기타를 들어보실 수 있을 거예요. <1999 indie power>라는 컴필레이션 앨범인데 언니네 이발관, 델리스파이스, 위퍼, 노이즈가든 등 그때 인디 신에서 열심히 활동하던 밴드가 다 참여했어요. 아마 2000, 20001년까지인가 했을 거예요. 그땐 컴필레이션 앨범이 유행이었죠. 지금은 음원을 발표하는 게 쉽지만 그때는 오직 CD로만 발표할 수 있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러니 여러 팀이 함께한 컴필레이션이 많았던 거죠.

정민준 : 대체로 재미로 시작하다보니 이름이 엉망진창인 밴드가 많았어요. 근데 의외로 인기가 좋아져서 방송에 나가게 되고, 그러면서 밴드 이름이 바뀌어 나가고 그런 사례들이 있었죠.


-예를 들면요?

정민준 : 일단 기억나는 건 저희 리얼쌍놈스가 리얼하트놈스, 아니면 리얼놈스, 리얼스 등으로 방송에 나갔어요. 그래서 현재 인터넷 검색으로 제대로 된 이름으로 찾으면 자료가 잘 안 나오죠.


-리얼쌍놈스로 방송도 나가셨어요?

정민준 :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 수도 있는데 각자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분들을 찾아가는 MBC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박상원의 아름다운 TV 얼굴>이란 프로그램이었는데, 예쁜 공원을 배경으로 머리 막 세우고 인터뷰했던 기억이 나요.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음악을 시작하셨는지 궁금합니다.

황현성 : 저는 어릴 때부터 많은 종류의 음악에 관심이 많았어요. 당연히 중, 고등학교 때는 록 음악도 많이 들었는데, 펑크라는 문화를 접한 거예요. “와, 이거 정말 획기적이다” 했죠. 크라잉넛이 저희보다 1년 선배인데, 1990년대에 한국에서 태동한 펑크의 형태를 보면서 이건 해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차승우, 기타치는 박진, 베이스 치던 정재환 이런 친구들과 동네에서 같이 음악을 했는데, 드럭에 놀러 가서 성우 형을 만난 거죠. 그때 ‘저 사람 되게 웃기게 생겼다, 같이 밴드하면 웃기겠다’ 그랬어요.

이성우 : 너무 웃기게 생겼었어 그때. 보는 관점이 그런 관점이었구나.

황현성 : 그렇게 하게 됐어요. 사실 전 그 당시에 기타를 즐겨 치던 사람이었는데 드럼을 칠 사람이 없었어요. 기타를 잘 치는 친구는 둘이나 있었고. 그래서 그냥 바로 ‘너 드럼 쳐’ 된 거죠. (웃음) 그래서 드럼 치고 공연을 그냥 했어요.

이성우 : 이 친구 기타도 잘 쳐요.


-원래 드럼을 칠 줄은 아셨어요?

황현성 : 치는 법은 알았지만 잘 치진 못했죠. 그냥 드럼 자리가 비어 있다고 해서 했어요.

이성우 : 드럼 스킬이 좋고 그런 건 아니었는데, 느낌이 좋았어요. 처음에 오디션 보자고 해서 그때...

황현성 : 뭔 오디션이야, 오디션은 또. (웃음)

이성우 : 그때 오디션이었지. 원래 저희 드럼 자리가 공석이어서 크라잉넛에서 드럼 치는 이상혁이란 친구가 저희를 도와주고 있었거든요. 근데 갑자기 이 친구가 와서 인사를 하더니 오디션을 본다고 해서 연주를 하는데 괜찮은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계속 하다 보면 뭔가 합이 더 나올 것 같아서 했죠.


-그럼 고등학교때부터 차승우 씨와 음악 활동을 하셨던 거예요?

황현성 : 동네에서 알던 친구들이었고, 동네에서 밴드를 만들었던 거죠. 근데 전 스쿨밴드에서 기타를 치다가 합주를 하면서 친구들을 안 거고, 그 밴드엔 합류하지 않은 상태였어요. 활동을 구체적으로 시작하진 않았던 거죠. 그냥 매일 음악으로 노는 거였어요. 마침 그때 펑크가 태동하고 있었고, 동네에 있던 친구들이 펑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저도 같이 간 거예요.


-그 동네가 어디인가요?

황현성 : 강남이에요. 신사동에 ‘화이트’라는 합주실이 있었어요. 거기 대장님도 음악을 굉장히 잘하시던 형님인데, 그 합주실에 온갖 친구들이 몰려와서 말 안 듣는 애들의 아지트였죠. 거기서 친구들도 만났어요. 전 거기서도 좀 아웃사이더였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 진짜 구체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던 친구들이 많았거든요. 실력도 좋고. 전 그냥 거기서도 눈에 잘 띄지 않는... (웃음)

이성우 : 거기 시나위 형님도 있었지.

황현성 : 맞아요. 김바다 형님도 있었고, 김바다 형의 친동생이 저희 예전에 베이스 공석일 때 세션도 해주고 다 얽히고설킨...


-그때 드럭에 가서 이성우 씨를 보신 거잖아요. 처음 보고 어떠셨어요?

황현성 :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가 매료됐던 펑크라는 문화 자체가 뭔가 인텔리하고 정성스러운 그런 걸 이유 없이 거부하던 시기였거든요. 그래서 마음에 쏙 들었죠. 목소리도 굵고, 비주얼도. (웃음) 노래 부르는 건 멋있었어요. 그때 얼굴까지 잘생겼으면 같이 하자고 안 했겠죠. 왜냐면 뭔가 완벽한 걸 거부하던 시기였으니까. (웃음)


-이성우 씨는 음악을 어떻게 시작하신 건가요?

이성우 : 제가 고2, 고3 때 진로에 대해서 엄청나게 진지하게 고민을 했어요. 제가 공부를 너무 못했고, 공부에 하나도 관심이 없었어요. 음악을 좋아하고 만화를 정말 좋아했죠. 제 유일한 낙은 만화 보기, 음악 듣기뿐이었어요. 그래서 고2인가 고3 때 아르바이트를 해서 기타도 샀어요. 기타를 갖고 거친 목소리를 내면 뭔가 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요. 그땐 만화를 잘 그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 너무 많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노래하고 시끄러운 기타 소리로는 하다 보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음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학교는 어느 지역에서 나오셨어요?

이성우 : 전 마산 출신이에요. 고3 때 다들 대학교 간다고 공부하고 있을 때 전 대학교 안 간다고 그냥 연습하러 가겠다고 했는데, 선생님께서 “너 그러다 후회한다. 대학교는 가야 하지 않겠느냐. 대학교에 가야 사람대접을 받는다.”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그래서 선생님 저 대학교 안 가도 후회 안 할 테니까 제발 저 좀 포기해 달라고, 대학교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죠. 야간 자율학습 때 안 나오는 대신 연습실 가서 연습할 테니 저 좀 포기해 달라고 했더니 선생님이 안 된다면서 그딴 식으로 할 거면 학교에 오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루를 안 갔어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특별히 봐줄 테니 대신 연습 열심히 하라고 하셨죠.

그땐 마산에서 밴드 멤버를 구하기가 어려웠어요. 밴드 하는 친구들은 입시 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저는 그때 갑자기 혼자서 음악을 한다고 하니 끼워주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혼자 대학교 연습실을 찾아가서 연습 좀 하면 안 되냐고, 노래 좀 가르쳐달라고 했어요. 그게 경남대였어요.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챌린저하고 노전자라는 밴드 동아리가 있었는데 거기서 연습했죠.


-그럼 졸업하고 서울로 오신 건가요.

이성우 : 졸업하고 아르바이트하면서 돈을 좀 모아서 서울로 왔어요. 그래서 밴드 멤버를 구해보자 하고 아르바이트하면서 서울에서 지냈는데, 밴드 멤버가 너무 안 구해지더라고요. 그땐 펑크 음악을 한다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펑크(punk)한다고 하는데 펑크(funk)하는 사람이 나타나고... 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같이 연주할 사람이 없지, 하다가 드럭을 찾아갔는데 거기서 크라잉넛 친구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드럭 아저씨가 밴드 멤버를 구해줄 테니 여기서 함께 뭔가를 해보지 않겠느냐, 해서 그때 드럭에서 크라잉 넛에 꼽사리 껴서 보컬을 했죠. 그러다 어느 날 이 친구(차승우, 황현성 등)들이 공연을 보러 왔죠. 처음엔 무대 옆에 와서 환호하니까 너무 좋았는데, 이게 3주, 4주, 두 달째 되어가니 지치기 시작하면서 그만 왔으면 좋겠다 싶었죠. (웃음) 그러다 같이 밴드하지 않겠느냐고 하기에 생각해보겠다고 튕겼어요. 한 번에 수락하면 재미없잖아요. 그래서 그 후에 친구들이 또 “형 제발 같이하면 안 돼요?” 해서 하게 된 거죠.


-드럭에서 크라잉넛을 만나고 할 때는 지금으로 치면 연습생 같은 개념이었던 건가요.

이성우 : 그렇죠. 그때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의 ‘Anarchy in the U.K.’라는 곡은 펑크를 좋아하면 기본적으로 할 수 있는 곡이었어요. 그걸 한번 해보자고 해서 연주를 했더니 좋다면서 어떻게든 밴드 멤버 구해줄 테니 계속 있으라고 한 거죠. 어떻게 보면 연습생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때 제 별명이 불대가리, 클린 버전으로는 불머리였는데 가끔 “야 불머리 오늘 같이 노래하자” 하면 무대에 같이 올라가고. 그러면서 대학교 페스티벌도 다니고 노래도 같이하고 그랬어요.


-당시 사장님 성함이...

이성우 : 이석문 사장님이었어요.


-이석문 사장님께서 인도해주신 거군요.

이성우 : 그렇죠. 보통 아저씨라고 부르는데, 아저씨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드럭의 문을 열어준 거죠. (웃음)


-그때 드럭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때인가요?

이성우 : 아니요, 전혀 자리를 잡지 못하고 망해가는 수준이었어요. 그 상황에 아저씨가 어디서 돈을 구해 와서 아내에게 욕을 얻어먹으면서 만든 게 <Our Nation Vol.1>이었어요. 앨범을 만들었는데 이게 팔리질 않으면 아저씨가 집에서 쫓겨나는 상황이라 다들 그거 판매한다고 엄청나게 고생했죠. 열심히 팔았어요. 그때 신대철 형님이 녹음도 하고 믹싱을 하셨는데 이야기하니까 되게 감추고 싶어 하시더라고요. (웃음) 저희로선 신기했죠. 그 앨범이 나오고 그다음부터 이제 빵 터지기 시작한 거예요.


-그때 지방에서 올라오신 거면 서울 어디서 지내 셨어요?

이성우 : 갈빗집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갈빗집에서 일하고 먹고 자고 했고, 음악학원에서도 일하면서 먹고 자고 그랬죠. 한 10년은 뭐 잘 데가 없어서 드럭에서도 자고... 드럭에 있는 의자를 쭉 붙여서 거기서 누워서 자고 아침에 추워서 일어나고. 황현성 이 친구도 가끔 같이 잤어요.


-정우용 씨는 어떻게 음악을 시작하셨어요?

정우용 : 전 처음엔 클래식 악기를 하고 싶었어요. 뭐든 클래식 악기를 하고 싶었는데,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서 중학교 땐 음악을 묻고 살다가 인문계 고등학교에 갔죠. 그렇게 공부에 흥미가 있던 것도 아니고 음악을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으니까, 또 어떤 게 좋을까... 하다가 기타를 처음 접했어요. 근데 그땐 제가 손이 커서 기타를 못 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때 베이스로 전향을 했죠. 음악을 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뭐라도 해보자 싶었어요. 고2 때 방송반인 친구가 짝이었는데 <Our Nation Vol.2> 앨범을 들어보라고 권유하더라고요. 이런 음악도 있구나, 그때 처음 노브레인을 알았어요.

저도 그때부터 팬이 되면서 실용음악과를 갔죠. 실용음악과에 가보니 펑크라는 장르를 되게 무시하더라고요. 그땐 저도 제가 왜 그렇게 삐뚤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왜 이렇게 펑크를 학교에서 무시하지? 교수들이 왜 펑크를 인정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컸어요. 학교에서 약간 삐뚤어진 학생이었죠. 제가 20대 초반에 밴드를 하기 시작하면서 노브레인 형들을 알게 되고 같이 공연하고 그랬는데, 그때 펑크(punk)에 빠지면서 학교에서 펑크(funk)에 대한 반항 심리가 좀 생겼어요.


-원래 밴드 활동을 하고 계셨군요.

정우용 : 네,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생들이랑 밴드를 했었죠.

이성우 : 얘 밴드 되게 많이 했어요. 홍대에서 세 개까지 했잖아요.

정우용 : 노브레인 세션맨 할 때도 세 팀을 하면서 여기 공연하고 바로 차 타고 다른 데 가서 공연하고 그랬죠.

황현성 : 그 팀들도 전부 펑크 흐름에서 빼놓을 수 없는 팀들이에요. 되게 중요한 밴드를 그때 다 하고 있었어요.


-어느 팀인가요?

이성우 : 슈가 도넛, 가요톱텐...

정우용 : 대전에 있던 버닝헵번이란 펑크 밴드가 있었고

황현성 : 카운터리셋도 있었지.


-컴필레이션이 한참 나오던 1999년, 2000년 그 시절 인디 신의 분위기는 어땠나요?

황현성 : 굳이 지금과 비교를 하면, 지금은 인디의 범위가 굉장히 넓잖아요. 넓고 개개인이 서로 다른 채널을 갖고 있다면, 그때는 클럽을 중심으로, 특정 장소를 중심으로 ‘패밀리’가 있었어요.

이성우 : ‘크루’라고 했죠.

황현성 : 맞아요, 크루. 친하진 않아도 옆 동네에 있는 인디 밴드, 옆 동네에 있는 인디 힙합 가수 그랬기 때문에 조금만 교류를 하려고 하면 바로 친구가 될 수 있었죠. 저희 클럽에서 몇 걸음 가면 걔네 클럽이 있으니까. 지금과 비교하면 그때는 좁았고, 적었고, 장르도 좀 한정적이었던 것 같아요. 어떤 장소를 중심으로 모였으니 좀 더 이웃 같은 느낌이었죠.


-그 장소가 홍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황현성 : 홍대, 이대, 신촌... 대학로 같은 데도 있었어요.

이성우 : 대학로에도 있었죠. 동네마다 음악적인 특색이 달랐어요. 신촌 쪽에 가면 머리 긴 헤비메탈 하는 크루들이 있고, 이대 쪽에 가면 하드코어가 있고, 홍대 쪽에는 펑크하고 각종 행위예술과 섞여 있는 음악들, 다양한 음악이 있었고 서로 간에, 또 파벌 간에 싸움도 있었고...

황현성 : 지방에도 생겨났죠. 대구, 부산...

이성우 : 그런데 라이브 클럽을 만드는 게 어떻게 보면 약간 유행 같았어요. 너무 많아서 클럽들의 스케줄을 한곳에 모아서 볼 수 있게 만든 책자도 있었죠. 그땐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그러는 게 익숙하지 않았으니까요. 팬들이 직접 만든 ‘팬진’이라고 해서 밴드에 대한 이야기들, 기사 같은 것들을 쓰는 책도 있었고, 되게 다양한 시도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정우용 : 그때 2000년대 초반은 펑크 밴드의 부흥기랄까. 지금의 가요처럼 인기가 많았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공연장을 찾으면 사람들이 엄청나게 찾아오고. 대전에 있을 때도 클럽에서 공연하면 사람들이 엄청 붐볐어요. 대전, 대구, 제주도에도 있었고... 클럽마다 상주하는 팀들도 있었죠. 그래서 그땐 클럽끼리의 교류도 많았어요.


-왜 그렇게 클럽이 많이 생겼던 걸까요?

이성우 : 그땐 뭔가 풀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자기의 억눌린 감정을 풀 곳이 없었죠. 저희 공연을 보러 오는 친구들이 중학생부터 고등학생, 그다음에 20대, 30대도. 심지어 40대 이상 저희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공연을 보러 오기도 했어요. 신기했죠. 어떻게 우리 공연에 이렇게 많은 연령대가 오지? 생각해보면 자기의 감정을 마음껏 내뱉을 수 있는 공간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춤추고 놀러 가는 클럽에 갈 수도 없고, 그냥 홍대에 가면 뭔가 해방구가 펼쳐진다는 그런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황현성 : 노브레인, 크라잉넛이 같이 태어난 클럽 ‘드럭’ 있잖아요. 여길 중심으로 소위 ‘인디 1세대’라고 불러주시는데, 사실 그전에도 언더그라운드 문화는 있었죠. 메탈 하시는 형님들도 있었고, 상업적이지 않은 음악을 하시는 분들도 계속 있었고. 그런 문화는 계속 존재했는데, 아마 저희가 당시에 펑크가 부흥하면서 독특한 문화로 사람들에게 재미를 준 것 같아요. 그때까진 정형화된 틀이 있었다면, 펑크가 뜰 때는 뭔가 공식도 없고 엉망진창이었거든요. 별 이유 없이 기존 것을 부정하는 문화였죠. 잘생기면 잘생겨서, 똑똑하면 똑똑해서, 깨끗하면 깨끗해서, 더러우면 더럽다고 부정했어요. 그런 재미에 심취해 있을 때였고, 관객들은 그걸 보면서 신선하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그땐 제가 생각해도 되게 괴상했어요.

이성우 : 괴상했지. 지금 봐도 이상할걸? (웃음) 그때 와, 이런 미친놈이랑 내가 밴드를 하는구나 하면서... 그런데 그때 주변에 보면 정말 이상한 애들이 다 모였어요.


-홍대에서 드럭 외에 섰던 클럽은 어디 있나요?

이성우 : 잼머스에서도 해봤고 다 했죠. ‘땅밑 달리기’라고 해서 라이브 클럽들끼리 연계해서 같은 날 한꺼번에 공연을 하는데 어디든 갈 수 있는 그런 행사를 했어요. 어떻게 보면 페스티벌이죠. 그런 걸 하면서 트레이드를 하는 거예요. 우리가 다른 데 가면 다른 밴드가 드럭에 오고. 근데 다들 드럭에 오는 걸 싫어했어요 장비가 너무 안 좋아서.

황현성 :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드럭이 아마 우리나라에서 제일 더러운 장소였을 거예요. (웃음)

정민준 : 근데 드럭이 팬들에게는 제일 좋았어요. 다른 좋은 장비를 가진 클럽보다 그 쓰레기 같은 정말 장비 안 좋고 시끄럽게 들리는 거기가 최고였어요.

황현성 : 맞아.


-당시 홍대 클럽들의 분위기가 궁금해요. 공연 때 분위기는 어땠나요.

황현성 :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진 않았지만, <Our Nation Vol.2> 무렵에는 이미 라이브 클럽에서 뛰어노는 문화가 뿌리내렸던 것 같아요. 저희가 다른 클럽에 가서 공연해도 관객들은 막 놀고 그랬던...

이성우 : 그런데 유독 그때 드럭에 오는 친구들이 과격하긴 했어요. 잘 놀고. 저희는 드럭에서 공연하는 게 제일 좋았어요. 왜냐면 서로 오래 본 것도 있고, 저희 음악에 과격하게 반응을 해줬으니까요. 왜 리액션이 좋으면 더 발광하고 까불게 되잖아요.

황현성 : 크라잉넛의 ‘말 달리자’랑 노브레인의 ‘청춘 98’ 뮤직비디오를 보시면 그때 애들이 어떻게 팬들과 관계를 형성했고 공연장에서 놀았는지 보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심지어 민준은 ‘청춘 98’ 뮤직비디오에 팬으로 나와요. (웃음)


-그럼 라이브 클럽들이 막 많아질 때 주로 장르적으로는 펑크가 많았나요?

이성우 : 네, 많았어요.

황현성 : 그렇게 라이브 문화가 전체적으로 부흥하면서 하드코어를 비롯한 다른 쪽도 같이 발전을 했어요.

이성우 : 예전에 미술학원이 되게 많았던 동네가 있어요 홍대 쪽에. 극동방송국에서 쭉 가다 보면 그쪽에 ‘잼머스’라는 클럽이 있었거든요. 거기서 자우림을 처음 만들었고.

황현성 : 그때는 ‘미운오리’였죠.

이성우 : 맞아요. 가사가 충격적이었던 게, ‘괜히 나한테 휘휘거리며 휘파람 불면서 그러지 마, 입 닥치고 공연이나 봐’ 이런 가사였어요. 그때 입이 탁 벌어지면서 ‘와, 저 사람 대단하다.’ 했죠. 내뱉는 에너지가 너무 강해서. ‘CCR’이라고 ‘초코크림롤스’라는 팀에 있던 (이)선규 형이 만든 팀이었어요.


-그 시기를 다들 무척 행복하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이성우 : 그땐 아무것도 몰라서, 아무것도 모르니까 두려운 게 없었죠. 저희도 이제 살다 보니 나이도 먹고 여기저기 눈도 보이고 하다 보니까...

황현성 : 속물이 된 거지.

이성우: 그렇지. 그러면서 생각을 하면서 움직이게 되잖아요. 그때는 생각이란 게 별로 없었어요. 그냥 바로 움직이는 거죠. 그래서 뭔가 과격한 메시지라든가, 필터링 되지 않았던 시기였어요. 지금은 그러지 못하니까. 나이도 먹었고... 그러다 보니 그때 생각하면서 다들 행복해하고, 재밌었다고 얘기하는 것 같아요.

정우용 : 너무 어렸으니까요. 겁이 없었던 시기였죠.


-당시 각 클럽의 하우스밴드, 클럽을 대표하던 밴드들은 어떤 팀이 있었어요?

이성우 : 드럭은 크라잉넛, 노브레인. 대전에 퍼지덕이란 클럽이 있었는데 버닝 헵번이라는 팀이 있었고...

황현성 : 클럽 빵에는 허벅지밴드가 있었고 스팽글의 코코어, 이대앞 하드코어에 쇠파이프랑 불타는 쇼바를 올려라…

정우용 : 추억의 이름들이다.

황현성 : 프로펠러21!

이성우 : 프로펠러21, 맞아. (웃음) 그리고 재머스에는 자우림이 있었던 것 같고요.

황현성 : 그리고 제주도에 99앵거라는 팀이 있었죠.

이성우 : 지역별로 색깔 강한 밴드들이 있었어요. 부산에는 피아, 레이니썬이 있었고.. 그 팀들이 갈매기연합이란 단체를 결성하기도 했어요.

황현성 : 부산 출신 밴드맨들끼리 나중에 서울에서 게토밤즈를 만들기도 했고…

이성우 : 도지사 있듯이 전국에 다 있었어요. 그래서 그 지역 가면 거기 밴드들이랑 다 같이 공연하고, 끝나고 난 뒤에 뒤풀이하고 하룻밤 자고 다시 올라오고. 그러면서 서로 교류도 많았고, 서로 잘해보자 으쌰으쌰 하던 에너지가 강했던 때였죠.


-뭉치기도 하셨어요?

이성우 : 네, 같이 연합 공연도 하고. 그때는 지금보단 밴드들끼리 연합해서 공연 같은 걸 많이 일궈내던 시기였어요. 지금은 합동 공연 끝나고 수고하세요, 하고 헤어지는데 예전에는 공연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미덕이었어요. 그래서 다 끝나고 같이 뭔가를 먹든지... 그게 불문율이었죠.

황현성 : 저희는 다른 클럽에 있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르는데, 다른 클럽들은 또 그들만의 문화가 있었을 거예요. 저희가 있던 드럭 같은 경우는 너무 자유로워서 아예 상하 관계가 없고 담벼락에서 자든지, 볶음밥을 먹든지 정말 상관 안 했어요. 하지만 공연이 끝나면 늘 같이 모여서 수다 떨고 술을 먹곤 했어요. 갈 사람은 가고... 드럭은 극단적으로 그런 자유가 넘쳐났어요.

이성우 : 동네방네 이상한 사람들 다 모였던 것 같아요.


-노브레인에게 드럭이란 어떤 존재인가요.

이성우 :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둥지 같은 느낌이에요. 저희가 알인 상태부터 새가 되어 날아갈 때까지 저희를 잘 보살펴준 둥지. 거기서 많은 걸 배웠어요. 일주일에 네 번 공연을 하면서 단련이 된 거죠. 격투기 선수로 따지면 도장 같은... 도장에서 갈고 닦다가 이제 시합을 다니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는 갈 수가 없죠.


-그럼 지금도 혹시 홍대에서 공연을 하시나요?

이성우 : 네, 클럽 FF라는 곳에서 가끔 공연해요. 클럽에서 나오는 특유의 에너지가 있어요. 저희는 그 에너지가 여전히 좋아요.


-홍대 초기에 스트리트 펑크 쇼라는 게 있었잖아요. 노브레인도 참여했나요?

이성우 : 노브레인 결성전인 1996년에 두번 열린 이벤트에요. 한 번은 홍대에서, 한 번은 명동에서 했는데 전 그때 ‘꼽사리’ 보컬로 크라잉 넛이랑 같이 노래를 했어요. 어마어마했죠 그때. 홍대 주차장 거리, 지금 상상마당앞에서 길 막아놓고 공연을 했거든요. 사람들은 펑크가 뭔지도 모르고 전자기타 소리가 나면 시끄러워서 길을 막던 시절인데, 그때 전 또 가능성을 본 거예요.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난리를 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죠. 근데 또 명동에 가니 명동도 난리가 나고 그러니까.


-분위기가 어땠어요? 이성우 : 엉망진창이었죠 정말. ‘갈매기’라고 지금은 킹스턴 루디스카에서 트롬본을 부는 최철욱. 그 친구가 거기서도 노래했었고... 어마어마했어요. 정말 재밌었죠. 저희가 지하 세상에서 지상으로 나온 기념비적인 상황이었거든요. 근데 그렇게 성황리에 치러낼 줄은 몰랐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환호할 줄은 몰랐어요.


-관객 반응은 어땠나요.

이성우 : 다들 흥분했어요. 무대가 되게 허술했거든요. 나무 판때기에 초록색 부직포를 그냥 박아놓은 무대였는데, 그게 나중에 다 너덜너덜해지고 들리고 그랬어요. 관객들이 흥분해서요. 관객들이 다 올라와서 그냥 다 부수는 무대였어요. 어떤 사진을 보면 무대 위에 있는 사람 중에 모르는 사람이 되게 많아요. 무대 위에 한 30~40명이 올라왔던 것 같아요.


-노브레인은 우리 펑크의 1세대로 불리잖아요. 왜 다들 펑크로 시작하신 건가요?

정민준 : 펑크가 음악 장르로 느껴지는 단어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뭔가 기존의 틀을 깨는 것. 그거 자체를 펑크라고 했죠. 너무 큰 힘을 가진 언어였고, 그 자체의 정신으로 모였던 것 같아요. 기타 디스토션 징징징 하고 드럼을 부수고 이런 건 친구들과 함께하면서 그런 사운드, 스타일이 생겼다고 할까요.

황현성 : 그렇다고 막 ‘우리는 기존의 틀을 깨야 해’ 이런 건 전혀 아니었거든요. 아무도 그렇게 심각한 사람이 없었던 것 같고 그냥...

이성우 : 그냥 세상만사가 다 싫었던 거죠.

황현성 : 네, 그렇게 다 싫고... 우리가 처음 모일 때는 실력, 노래, 연주 이런 것보다는 얘가 우리 친구인가, 그 결을 봤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희끼린 그냥 다 낄낄거리고 비슷한 분위기에서 비슷한 무리끼리 어울리는 느낌이었어요. 저희가 크라잉넛의 연주를 유심히 본다거나 이런 느낌이 아니었죠. 그냥 막 땀 흘리면서 같이 놀고 끝나면 술 먹으면서 진짜 전혀 의미 없는 대화, 막 농담 따먹기 하고. 그러니까 저희끼리 어떤 결속력이 생기면서 우리는 약간 좀 달라, 하는 게 있었죠.

이성우 : 엑스세대와는 다르다는 거죠.

황현성 : 네, 약간 그런 삐뚤어져 있는, 뭔가 다듬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굉장히 무의식적으로 자부심이 있어서. 그런 사람들끼리 모이고 자연스럽게 같이 성장했어요.


-펑크에 관심을 갖거나 빠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이성우 : 저희 세대는 헤비메탈이 주류 음악이었는데 어느 날 전 세계적으로 너바나(Nirvana)라는 밴드가 큰 인기를 끌었죠. 그다음에 그린 데이(Green Day)가 나오고, 예전에 유행했던 섹스 피스톨스라든지, 더 클래시(The Clash) 같은 밴드가 재조명됐어요. 저희는 그걸 들으면서 ‘우와, 우리가 여태까지 들은 건 뭐지? 이건 신세계야.’ 그랬죠.

충격적이었어요. 뭔가 정제되지 않았고, 날 것의 느낌. 공연 중에 기타를 부수고 그런 걸 고3 때 봤거든요. 그런 걸 하고 싶더라고요. 그땐 무슨 장르인지도 몰랐어요. 저희 집에 위성TV가 나왔는데,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이 공연을 하다가 갑자기 기타를 부수는 거예요. 그런 걸 보면서 저런 음악을 하고 싶다 생각했죠. 그 이후로 지금까지 펑크를 계속 듣게 되고, 탐구생활이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 당시에 펑크 외에 다른 장르 신은 어떤 게 있었나요?

이성우 : 헤비메탈이었죠. 대학로에서 통기타 치는 선배님들과는 좀 멀리 떨어진 존재였고, 저희와 그때 많이 부딪히는 건 헤비메탈 형들이었어요.


-부딪혔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이성우 : 헤비메탈 하는 선배들 입장에선 갑자기 머리 이상하게 하고 코드 몇 개로 연주도 엉망진창으로 하는 애들이 무대에 오른 거잖아요. 거기다 또 저희가 공연할 때 무대 시스템이 엉망이었죠. 말도 안 되는 앰프 갖다 놓고 공연하고... 지금 그 공연장에서 공연하라고 하면 저희도 힘들 거예요. 마이크도 제대로 된 것도 아니고 노래방에서 쓰는 것 같은 마이크를 쓰고 그랬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든 연주를 하고 공연을 하고 거기다 한글 가사로 노래를 부르고. 그러니까 헤비메탈 하는 선배들 입장에선 갑자기 뭣도 모르는 놈들이 와서 이런 음악을 한다고 어이없어했죠.


-무시한 건가요.

이성우 : 무시도 많이 하고 저희랑 트러블도 있었고...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죠. 예를 들어 같이 어떤 페스티벌에 올라갔는데, 저는 리허설 하는 걸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거든요. 근데 갑자기 막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셔서, 저도 모르게 저도 손가락이 올라가더라고요. (웃음) 또 지금은 페이스북이라든가 SNS에서 싸우잖아요. 예전에는 잡지 인터뷰로 싸웠어요. ‘걔네 되게 별로더라’ 이러면 ‘이제 슬슬 머리 좀 자를 때 됐을 텐데’ 이러면서 서로 디스를 하는 거예요. 밴드는 노래로 디스를 하는 게 아니고 인터뷰로 그렇게 디스를 하고 조금씩 트러블이 생겨서 경찰서를 가는 친구도 있었고. (웃음)

황현성 : 근데 생각보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존의 언더그라운드 선배님들하고 트러블이 있던 기간이 길지 않았어요.

이성우 : 그렇게 짧지도 않았어. 몇 년쯤... 그래도 그 와중에 저희를 안아주는 선배님도 계셨죠. 시나위 (신)대철 형님 같은 경우 저희를 정말 많이 챙겨주셨어요. 저희로선 좀 신기했죠. 제가 처음 마셔본 위스키도 대철 형이 준 거였어요. 어떻게 보면 제겐 어마어마한 록스타인데, 페스티벌 가는 길에 같이 걸어가다가 갑자기 “야, 너 이거 한 잔 마셔 볼래?” 하면서 주셔서 벌컥벌컥 마셨죠. 그때 제게 위스키는 되게 비싼 술이었는데 그 형이 제게 줘서 신기하고, 부럽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땐 헤비메탈 하는 분 중에서 잘나가는 분들도 많았잖아요.

이성우 : 아유, 그땐 헤비메탈 하는 분들에게 저희가 비빌 처지가 아니었죠. 헤비메탈 밴드 공연하면 전석 매진되는데 저희는 그때 공연하면 열 명, 스무 명 왔어요. 심지어 어떤 밴드는 관객이 두 명 와서 연주하고 있는데 관객 두 명이 나가버린 거예요. ‘이거 어떻게 해야 하지?’ 잠깐 멈춘 상태로 있는데 두 사람이 화장실에 갔다가 들어와서 다시 막 연주하고 그랬죠. 관객이 없을 때도 있었어요. 아예 관객이 없을 때도 있었어요. 크라잉넛이 연주할 때 되면 저희 노브레인 멤버들이 가서 막 부딪혀가면서 춤추고 다이빙하면 저희끼리 받아주고 밴드들끼리 놀고 그랬어요. 헤비메탈 밴드는은 인기가 많아서 좋겠다, 그런 생각 했었죠. (웃음)


(노브레인 인터뷰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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