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스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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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소개[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김시스터즈는 김해송이난영의 두 딸(김숙자·김애자)과 이난영의 오빠 작곡가 이봉룡의 딸(김민자)로 구성된 3인조 걸 그룹이었다. 이들은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노래와 함께 춤까지 췄으며, 1953년 데뷔해 '미8군 쇼'에서 활약했다. 김시스터즈는 미국에 진출해 큰 성공을 거둔 '최초의 한류 아이돌'이었다. 1959년 미국 최고의 버라이어티쇼였던 CBS '에드 설리번 쇼'에 소개되면서 인기를 끌어 25번이나 출연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김시스터즈 All shook up 영상 아카이브



2015년 김대현 감독의 다큐멘터리 《다방의 푸른 꿈: Try To Remember》가 2015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상영되었다. 이 작품은 김시스터즈에 관한 다큐멘터리로서 이난영에 의해 김시스터즈가 만들어진 배경과 연습, 음악가 집안에 따른 천부적인 음악적인 감성, 공연감, 미국 라스베이거스 등을 건너가는 과정, 1년 만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 과정을 김민자의 시점에서 이야기하였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김시스터즈의 활약상은 김숙자의 인터뷰 등 주변 인물들의 다양한 증언으로 드러나고 있다.



김시스터즈 음악 인생[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한국전쟁 중 당대 천재 작곡가 김해송이 납북되고 만다. 그대로 활동을 계속했더라면 이후 한국의 대중음악사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던 뮤지션이었다. 당장 남겨진 부인과 일곱명의 어린 남매의 생계가 곤궁해졌다.


남겨진 김해송의 부인은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이었다. 알콩달콩 살면서 딱 스무명의 애들만 낳아서 기르자고 하면서 부지런히 애들을 낳았건만, 남편은 납북되어 버리도 연년생 줄줄인 어린 일곱남매만 이난영에게 남겨졌다. 하늘이 무너지고 눈앞이 하얗게 되었을 것이다.


살 길이 막막해진 이난영은 암시장에서 외국 음반을 사다가 딸들에게 들려주면서 무조건 노래를 외우게 했다고 한다. 부모들의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았는지 딸들이 노래를 곧잘 했다. 가능성을 확인한 이난영은 1951년 열살 전후의 연년생 딸들인 영자, 숙자, 애자를 멤버로 '김시스터즈'를 결성해 미군 클럽에 진출시켰다.


세 자매는 클럽에서 2차대전 직후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미국의 여성 보컬그룹 '앤드루 시스터즈'의 히트곡을 뜻도 모르고 무작정 외워 노래했다. 앙증맞은 아이들 노래에 미군들은 열광했고, 미군들 사이에 김시스터즈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김숙자씨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미군클럽 공연 때 출연료 대신 위스키 몇 병을 받았고, 이난영이 시장의 암상인들에게 연락해서 쌀과 바꾸곤 했다고 한다.


김시스터즈는 휴전 직후인 1953년 가을, 수도극장(스카라극장)에서 자매 트리오의 탄생을 공식적으로 알렸다. 김시스터즈가 부른 앤드루 시스터즈의 노래는 발음은 엉망이었지만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미8군 클럽의 나름 스타였다.


1958년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아시안쇼를 기획하고 있는 톰 볼이 새로운 흥행거리를 찾기 위해 일본을 찾았다가 그곳 미군들로부터 김시스터즈의 명성을 듣게 된다. 톰 볼은 1958년 한국으로 건너와 김시스터즈의 잠재력을 확인한 후 이난영과 계약을 체결했다. 키가 큰 장녀였던 영자 대신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역시 작곡가였다.)의 딸 이민자(김민자로 개명...어쨌든 김시스터즈의 일원이 되어야 했으니)로 새롭게 그룹을 구성한 후 1959년 1월 9일 미국땅을 밟는다. 해외진출 1호 보컬팀이었다. (최초로 미국에 진출한 한국가수는 옥두옥이다.)


김시스터즈는 라스베가스 선더버드 호텔의 쇼프로그램 '차이나 돌 레뷔'에 둥지를 틀었다. 김시스터즈는 첫 4주동안 매일 밤 2개 쇼에 출연했고, 관객의 반응이 시원치 않으면 4주 후 한국으로 돌아가는 조건이었는데, 다행히 선더버드 호텔공연은 대박이었다. 다른 호텔에서도 공연 요청이 쇄도했다.


이런 대박은 우연히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물론 아시아인에 대한 미국인들의 신비감 등이 작용하기도 했겠지만 세 자매의 각고의 노력이 뒷받침된 결과였다. 이들 자매는 노래에 대한 재능 뿐만 아니라 색소폰, 베이스, 드럼, 가야금, 장구, 북 등 10여 개 이상의 악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다.


김시스터즈가 라스베가스를 넘어 도약하게 된 계기는 당시 미국 최고의 TV 버라이어티쇼였던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하면서부터이다. 에드 설리번 쇼 출연 이후 세 자매에게 음반 제의가 들어오고, 그룹 코스터스의 히트곡을 리메이크한 '찰리 브라운' 등 12곡을 수록한 첫 음반이 1960년에 출시된다. 거의 모든 곡이 영어였으나, '아리랑'과 이난영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봄맞이'만은 한국어로 했다.

에드 설리번쇼 김시스터즈.jpg프랭크 시나트라와 김시스터즈.jpg


음반출시 이후 '라이프지' 1960년 2월호에 특집화보 기사로 소개되고 '찰리 브라운'은 1962년 빌보드 싱글차트에 오를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공연무대도 라스베가스를 벗어나 뉴욕,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등으로 넓어졌고 주급도 500달러에서 2만 달러를 넘었다. 1967년에는 50만 달러의 세금을 납부해 라스베가스 고액 납세자 중 6위에 랭크될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김시스터즈는 1968년 민자와 애자가, 69년엔 숙자가 결혼하면서 활동이 뜸해졌고, 1970년 한국 귀국공연을 끝으로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았다. 1973년 사촌인 민자가 탈퇴한 후 1975년 큰언니 영자가 합류하면서 1951년의 구성원으로 돌아가 10년간 활동했고, 오빠동생들로 구성된 김브라더스와 함께 6인조로 활동하기도 했다.


애자는 1987년 폐암으로 사망하고, 숙자는 라스베가스에서 부동산업을 하고 있고, 민자는 헝가리계 재즈뮤지션과 결혼한 후 현재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살고 있고 여전히 남편과 함께 공연을 하고 있다고 한다.

김시스터즈 미국 진출 음반[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김시스터즈 미국 진출 음반


SIDE A

1. Try To Remember 3:59

2. China Nights 2:54

3. Harbor Lights 2:46

4. Roses In The Snow 2:23

5. Chinese Lullaby 2:16

6. Danny Boy 2:52


SIDE B

1. Charlie Brown 2:34

2. Hawaiian Wedding Song 2:23

3. Arirang 1:54

4. You Can't Have Everything 2:07

5. Korean Spring Song 2:40

6. Hallelujah I Love Her So 2:36


애자, 민자, 숙자 (Aija, Mia, Sue) 1964

Monument Records, SLP 18022


Arranged By – Joe Tanner

Engineer – Bill Porter, Tommy Strong

Liner Notes – Ed Sullivan

Producer – Fred Foster

Technician – Bill Vandevort
대표곡
우리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