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

김민기

기본 사항[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이름
김민기
출생
1951년 3월 31일
소속
극단 학전(대표)
학력
재동초등학교,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회화학과
데뷔
1970년 노래 <아침이슬> 1971년 앨범 <김민기 1집>
참고 영상 
JTBC 뉴스룸 영상


소개[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이자 대한민국 포크송의 역사를 논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뮤지션


국내 대중음악계에서 형식적인 면(연주, 편곡)에서 혁명을 가져온 게 록과 흑인음악을 도입한 신중현이라면, 내용적인 면(노랫말, 감성, 메시지)에서 혁명을 가져온 것이 김민기이다.


정치적 행보를 밝히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시의 운동권 예술가들은 현재까지 그 성향을 이어가서 진보적 정치 성향을 드러내거나, 또는 전향하여 보수적 정치 성향을 드러내던지 해서 자신의 정치 성향을 드러내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하지만 정작 그 중심에 서있는 김민기 본인은 자신의 정치 성향에 대해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윤이상, 백남준과 더불어 국내의 3번째 괴테 메달 수상자 [수상 작품 : 뮤지컬 지하철 1호선]


김광석추모사업회의 회장.

김광석 다시부르기 프로젝트도 그의 소관이라고. 생전에 김광석은 김민기 덕에 대학로의 스타가 될 수 있었고, 김민기 또한 그의 등장으로 학전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 서로가 은인인 셈.

연도별 활동[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1951년 3월 31일 - 전라북도 이리(현 익산시)에서 10남매인 6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의사였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인민군에 의해 피살됐다. 어머니는 조산원이었다.

1963년 - 재동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경기중학교 입학, 수업이 끝나자마자 미술실에 틀어 박혀 그림을 그리는 등 미술반 활동을 열심히 했다. 이때 이미 우쿨렐레를 연주할 수 있었다.

1966년 -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미술반 활동을 계속했고, 기타를 독학했다.

1969년 -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입학 당시 대학 동기였던 김영세와 함께 ‘도비두’(도깨비두마리) 라는 포크 팝 보컬 듀오를 결성하여 첫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1971년 《김민기 1집 - 아하 누가 그렇게/길 (김민기 노래모음)》을 시작으로 솔로 가수 겸 작곡가의 삶을 시작했다.

1973년 - 김지하가 희곡을 쓴 연극 《금관의 예수》의 전국 순회 공연에 참여했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노래 `금관의 예수`를 작곡했다.

1974년 - 소리굿 《아구》의 극본을 썼다.

1975년 - 당국에 의해 그의 노래 `아침이슬`이 금지곡이 됐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장석주는 “금지곡들은 분명한 금지사유가 명시됐지만 이 노래에는 아무런 금지사유가 명시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다”라고 말했다.[3]

1977년 - 입학한 지 7년 만에 서울대학교 미대 졸업했고 당시 미대 학장의 배려로 교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1978년 -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작사, 작곡했다.

1983년 - 연극 《멈춰 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의 극본, 연출을 맡았다.

1984년 - 음반 <노래를 찾는 사람들1>을 제작했다.

1991년 - ‘겨레의 노래’를 총감독했다. 극단 학전 개관.

1993년 - 《김민기 전집》을 발표.

1994년 - 국내 최장수 기록 가진 뮤지컬 <지하철1호선> 공연 시작.

음반[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김민기 1집 (1971年)
친구 아하 누가 그렇게 바람과 나
저 부는 바람 꽃 피우는 아이
아침 이슬 그날 종이연
눈길(연주곡)
김민기 전집 1 (1993年)
가을편지 내 나라 내 겨레 두리번 거린다
꽃 피우는 아이 아침 이슬(연주곡) 아침 이슬
잃어버린 말 아름다운 사람 그날
친구 잘가오 Morgentau
김민기 전집 2 (1993年)
새벽길 나비
혼혈아(종이연) 그사이 고향 가는 길
철망 앞에서 눈산 차돌 이내몸
아무도 아무데도 바다 눈길(연주곡)
김민기 전집 3 (1993年)
상록수 기지촌 가뭄
식구생각 서울로 가는 길 늙은 군인의 노래
강변에서 주여, 이제는 여기에 소금땀 흘리흘리
밤뱃놀이
김민기 전집 4 (1993年)
봉우리 아하 누가 그렇게 백구
작은 연못(연주곡) 날개만 있다면 작은 연못
인형 고무줄 놀이 천리길
아침(연주곡)
기타
지하철 1호선 공장의 불빛 이 세상 어딘가에
소리굿 아구
기울임체로 쓰여진 작품은 2004년 'Past life of 김민기' 에 수록된 작품입니다.


주요 작품[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아침이슬>[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1971년 김민기가 작사, 작곡한 대표적인 민중가요. 김민기의 1971년 1집 앨범에 수록되었으며, 같은 해 동일한 곡을 김민기가 편곡하여 양희은이 부른 아침 이슬이 대중들에게 더 유명하다.


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노래패 ‘아침이슬’이 이 곡의 제목에서 따왔다. 이후 명칭이 바뀔 때도 가수 양희은의 이름을 따 ‘희은’이라는 명칭으로 현재까지 활동중이다.


9월 13일에 방영된 뉴스룸의 인터뷰에서 밝히길, 원래 아침 이슬이라는 곡을 구상할 때에는 영감이 오지 않아 막혀있었다고 한다. 그것의 원래 가사는 '그의 시련일지라'였는데, 이것을 어찌어찌 '나의 시련일지라'로 바꾸어 보았다고 한다. 그렇게 바꾸어보니 훨씬 더 감정의 이입이 잘 되고, 당시의 시대상을 마주한 '나'의 기분을 잘 쓸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때부터 가사가 잘 써지기 시작하고, 아침 이슬이 탄생했다.


실제로 1971년 김민기 앨범의 원곡은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듯한 창법으로 노래되며, 이는 같은 해 양희은이 노래한 직설적이고 곧은 발성의 아침 이슬과 사뭇 다르다. 이 앨범에 참여한 정성조 쿼텟이 클래식 풍의 편곡을 선보였기 때문에 보다 세련된 면이 있다.


따라서 '붉은 태양이 김일성의 공산주의 혁명을 의미한다'는 주장은 우익측의 아전인수식 해석에 가깝고, 굳이 좌익적인 해석을 붙인다면 '독재의 탄압 아래 신음하는 민중이 언젠가는 다시 일어설 것'이라는 해석이 타당하다. 실제로 집회에 참석한 군중들 사이에서 아침 이슬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정말 뭔가 처연하고 장중한 분위기가 조성되는 기분이 든다. 아침이슬 시위.


다만 가사의 해석을 떠나 작곡적인 측면에서는 혁명적인 구조를 하고 있는데, 유행을 노리는 전형적인 노래 구조인 A-A'-B-A 구조[4]에서 벗어나 A-A'-B-C 라는 새로운 구조를 하고 있다. 또한 C장조임에도 불구하고 4도인 F음(파)으로 불안정하게 시작하고, 클라이맥스(B) 이후에 메인 테마(A)로 돌아오지 않고 또 다른 새로운 테마(C)로 진전하며 끝나버린다. 이는 메인 테마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킴으로써 앨범 판매를 부추기는 A-A'-B-A의 구조가 아니었기에, 1971년 처음 이 곡이 김민기의 앨범에 발표되었을 때에는 비명도 못 지르고 3천 장의 앨범도 판매하지 못한 채 시장에서 묻혔다.


하지만 이 메인 테마로 돌아오지 않는 파격적인 구조는 '광야로 떠나는' 가사와 절묘하게 맞물려서 당시 한국 운동권들의 주요 이데올로기였던 혁명적 낭만주의가 가장 수용하기 쉬운 민중가요로써의 아침 이슬을 탄생시켰으며, 여기에는 양희은의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단호한 목소리가 큰 요소로 작용하였다. 아침 이슬이 운동권 집회에서 널리 불려지고 유신 정부의 금지곡 지정이 겹치면서, 1987년 6월 항쟁 당시에는 신촌 로터리 부근에 운집한 100만 명의 군중들이 유일하게 다 같이 아는 노래가 애국가와 아침 이슬밖에 없었다고 할만큼 대중적인 민중가요가 되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나 2016년 11월 26일 박근혜 즉각 퇴진 5차 범국민행동 때 광화문 광장에 운집한 100만 인파가 양희은과 함께 아침 이슬을 다시 부르기도 했다.영상, 떼창이 더 잘 표현된 이 영상은 정말 장관이다.


이수만의 경우 다른 무대에서 아침 이슬을 불렀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을 뻔한 적도 있다.


여담으로 북한의 중학생들과 대학생들이 1990년대에 전국적으로 널리 부르던 곡이라고 한다. # 심지어 탈북자 출신의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의 블로그에 따르면 북한에서 군 생활 당시 훈련받을 때도 이 노래를 합창했다고 하니, 한국에서는 금지곡인 노래였지만 북한에서는 상당히 대중적인 노래였던 것 같다.[8] 하지만 유행했던 시기가 하필 고난의 행군 때여서 이 노래가 전국적으로 유행하자 북한 지도부에서 불안감을 느끼는 바람에 1998년에 금지곡이 되었고, 현재 아침 이슬을 부르다 당국에 걸리면 강제노동형에 처해진다고 한다. 인민의 소리 방송에서는 이 노래를 약간 개사해서 내보낸다. 심히 골룸한 건 이 방송은 배경 음악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도 내보낼 때가 있다는 것.

<친구>[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김민기 1집에 수록된 곡. 아침 이슬만큼은 아니지만 유명한 민중가요로, 폭풍 같은 80년대에 많이 불리우던 노래이다. 그러나, 김민기는 이 노래를 그러한 의도로 작곡하지 않았는데, 사실 이 노래가 쓰인 배경은 이렇다. 김민기가 고3일 적에 동해시로 야영을 갔었는데, 그 때 후배 하나가 불미스러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이를 그 후배의 부모님에게 알리기 위해 서울 가는 기차에서 즉석으로 쓴 노래인 것. 하지만 어째서인지 시위를 하다 사망한 열사를 '친구' 로 묘사하며 그를 추모하는 추모곡 겸 데모곡으로 쓰이게 되었고, 지금의 민중가요가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진보적 정치성향을 가진 노래패들이 종종 이 노래를 부르곤 한다.


위의 내용과는 별개로 '친구' 가 제목이라는 점, 그와는 대비되게 '죽음' 을 소재로 다루었다는 점, 노래 자체가 잔잔하고 은은하며 가사도 굉장히 서정적이라는 점 때문에 7080세대가 굉장히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이다. 유튜브만 봐도 아침 이슬이나 상록수처럼 민중가요로 매우 유명한 노래들을 제외하면 가장 조회수가 높은 곡이다.


노무현 대통령 8주기 때 불리우거나, 세월호 사건 추모 영화의 주제곡으로 선정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사회적 여파가 대단한 듯.

<바람과 나-한대수>[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1974년, 한대수가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와 김민기를 위해 작곡해준 곡. 때문에 바람과 나가 수록된 첫 앨범은 한대수의 멀고먼 길이 아닌 김민기의 김민기 전집이다. 이후 한대수는 지인의 주선으로 신세계레코드에서 계약금 50만원을 받고 멀고먼 길 앨범을 녹음하게 되고, 마침내 한대수도 1974년에 자신의 앨범에 바람과 나를 수록하게 되었다. 얼마 뒤에 멀고먼 길이 긴급조치에 의해 금지곡 처분을 받자, 바람과 나 또한 덩달아 금지곡이 되어버렸다.


'님'을 바람에 빗대어 바람에 대한 연모를 덤덤하게 표현한 노래한 곡이다. 특이하게도 부르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가 날 때도 있는데, 한대수가 부른 바람과 나는 투박한 멋과 정통 포크의 느낌이 느껴지는 반면 김민기의 바람과 나는 수려한 멋과 은은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종이연>[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1971년 김민기 전집에 수록된 노래. 처음 작곡했을 때 지어진 제목은 '혼혈아' 였으나, 공연윤리위원회에 의해 검열되어 할 수 없이 노래 중 등장하는 소재인 '종이연' 으로 제목을 바꿔 발매했다. 22년이 지난 1993년에서야 김민기 2집에 이 노래의 제목을 '혼혈아' 라고 수록할 수 있었다.


노래 가사와 분위기가 굉장히 암울하다. 일단 노래 장단부터가 타령조로, 애달픔과 한이 서려있다. 게다가 노래의 화자는 혼혈인 어린 아이로, 어머니가 헬로아저씨를 따라갔다는 것을 보면 기지촌에서 일하던 양공주였고, 간밤에 편지 한 장만 댕그러니 써놓고 아이를 버린 것으로 보인다. 혼혈아에 대해 인식이 좋지 않던 당시에는 혼혈아와 어울리는 것을 꺼렸고, 친구도 없는 그 아이는 종이연을 가지고 혼자 쓸쓸히 논다는 내용. 게다가, 열차길에서 논다고 하질 않나, 열차가 달려오는 소리를 '하늘나라 올라갈 나팔소리' 라고 암시하는 것을 보면.. 아이의 미래 또한 상당히 암담하다.

<가을편지>[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1971년 고은이 작사하고 김민기가 작곡해 최양숙이 부른 노래. 1968년 어느 겨울 날, 당시 동숭동의 막걸리집 술자리에는 고은과 대중음악평론가 최경식, 그의 동생인 최양숙과 그녀의 친구 김광희가 있었다. 최양숙과 김광희는 각각 서울대학교의 성악과와 작곡과에 재학 중이었는데, 최경식이 술에 거하게 취했을 때 즈음 그가 고은에게 시 한 편을 읊어달라고 요청했다. 그 노래는 이후 양희은의 <세노야>가 되었고, 그 때부터 그들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런 인연으로, 최경식이 곧 음반을 낼 최양숙을 위해 노랫말을 써달라고 요청했을 때 고은이 즉석에서 건넨 가사가 바로 <가을편지>이다. 이후 이 노랫말은 김광희의 서울대 1년 후배인 김민기에게 작곡이 맡겨졌고, 이내 최양숙의 음반에 수록되었다. 작곡가인 김민기가 이를 새로 녹음하여 자신의 음반에 싣게 되는 것은 약 20년 뒤 즈음인 1993년이다.

<아름다운 사람>[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김민기 1집에 수록된 곡. 김민기에 의해 1971년에 작곡되어, 같은 해에 서울대 회화과 신입생 환영회 때 여성 포크 그룹 현경과영애가 세상에 처음 선보였다. 그녀들이 부른 아름다운 사람을 보고 작곡가 김민기가 직접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최고의 노래' 라고 감탄하기도 했다. 노래 자체는 김민기가 생각하는 인간 군상을 아이에 빗대어 표현한 곡으로 그 따뜻하고 희망적인 곡의 분위기가 노래 가사와 아주 잘 어울린다.

<Morgentau>[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2004년 <Past life of 김민기>에 수록된 독일어 버전 아침 이슬. 김민기의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원래 독일의 원작을 번안한 작품인데, 한국에서 이것이 초히트를 치고 기어이 2000회까지 공연하게 됐다.[10] 이를 본 독일 원작의 공연팀인 독일 그립스 극장의 단원들이 김민기의 지하철 1호선 2000회째 공연을 축하하기 위해 직접 내한하여 건네준 선물이다. 원작자 폴커 리트비히가 직접 아침 이슬의 가사를 독일어로 번역했다고.

<그사이>[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김민기 전집 2번째 앨범에 수록된 곡. 사연을 쓰자면 밤을 새고도 모자를 김민기의 아침 이슬, 상록수와 같은 곡과는 달리 창작 동기나 사연, 당시의 상황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저 김민기가 작곡하고, 1972년에 양희은의 앨범에 수록되었다는 것 뿐. 이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김민기 전집이 발매되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일부 노래를 제외한 김민기의 노래들이 사람들의 머리에서 잊혀져 갔지만, 위의 두 곡을 위시한 다른 곡들은 그 가치를 인정 받아 아직까지도 불리우고 있는데, 그사이 또한 그러한 노래들 중 하나이다. 김민기의 여타 노래들처럼 사회 현실에 저항하거나, 김민기의 노래들 중 태반이 가지고 있는 특성인 쓸쓸함, 분개 같은 감정도 일절 느껴지지 않다. 오직 '노래'로서 존재하는 노래인 것이다. 때문에 민중 가요를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즐겨 들을 수 있는 노래이다.


그사이가 인기가 있는 이유는, 김민기의 노래 치고는 너무 따뜻하고, 서정적이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김민기의 히트곡들은 노래가 너무 우울하거나 노래는 좋은데 배경이 너무 우울하거나 현실이 우울하거나⋯ 죄다 따뜻한 분위기라곤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곡들이었다. 하지만 그사이는 분위기 자체가 따뜻하고, 듣다보면 머릿속에서 풍경이 그려질 정도로 서정적이다. 이 때문에 김민기의 노래를 정말 좋아하는 이들은 대부분 그사이를 알고 있으며, 이따금씩 이 노래를 김민기의 노래 중 가장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꽤 있다.

<철망 앞에서>[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1993년에 발매된 김민기 전집 두번째 앨범에 수록된 곡. 윤영로, 권혁진이 함께 불렀다. 노래가 시사하는 바도 분명하고 꽤 유명한 곡이라 창작 동기나 후일담 따위가 있을 것 같지만,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러다가 2018년 9월 13일분 JTBC 뉴스룸에 본인이 출연하여 노태우 정부의 남북 예술단 교류사업 과정에서 남측 공연단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엔딩곡이 필요해서 만들었다는 비화를 전하였다.


이 노래가 유명해진 계기는 YB가 1999년에 부른 것이다. 이외에도 박완규, 김장훈, 윤도현, 김경호 같은 당시 유명한 가수들이 상당히 많이 참여해 합창한 버전도 있었으니, 당시 통일 노래로서의 철망 앞에서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거기다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출범 이후 적극적인 햇볕정책을 시행하면서, 철망 앞에서의 유행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정말로 통일이 될 것만 같았다. 물론 실패하긴 했지만, 워낙 노래 자체가 좋고 메세지가 명확하기 때문에 진보적 노래패나 합창단에서는 지금까지도 자주 불리우는 곡이다. 대표적으로 노찾사.

<상록수>[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김민기가 작사, 작곡한 노래.

아침 이슬과 더불어 1970년대 대중음악을 논할 때 절대 빼놓을수 없는 명곡.


가수 양희은이 1979년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발표하여 널리 알려진 노래다. 원래 노동운동을 하던 김민기가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에 부를 축가로 만든 노래였지만, 금지곡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민주화 운동 때 아침이슬과 더불어 대표적인 투쟁의 노래로 꼽혔다.


후에 금지곡에서 해제되었고 1993년 김민기가 자신의 대표곡을 재녹음한 컴필레이션을 발표했을 때 제목을 "상록수"로 바꿔달았다. 1998년, 박세리 선수가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할 당시 양말을 벗고 물속에서 퍼팅하는 장면을 사용한 공익광고의 배경음악으로 쓰이면서 다시금 주목받았고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삼일절 기념식에서 불려지기도 했다.


또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2년 16대 대선 때 직접 기타를 치면서 부른 광고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욕쟁이 할머니 국밥집 광고와 함께 유명한 대선 광고로 꼽힌다. 이 노래는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불렸다. 다만 노 전 대통령이 생전 가장 좋아한 노래는 자서전 "운명이다"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어머니'였다고 한다.

<기지촌>[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1973년 김민기가 작곡한 노래. 처음에 작곡을 했을 때에는 가수 윤지영의 음반에 수록될 예정이었으나, 공연윤리위원회에 의해 검열을 당하여, '황혼' 이라고 제목을 바꾼 후에야 발매가 되었다. 공윤에 의해 가사에 심각한 수정이 가해진 것은 덤. 이후 1993년 김민기 3집에서야 제대로 김민기의 노래로 수록되었다.


멋들여진 반주와 더불어 굉장히 서정적인 가사가 가미된 높은 완성도와는 달리, 노래 자체가 작곡되는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73년 당시, 윤지영의 음반사가 김민기에게 윤지영의 앨범에 수록될 노래를 하나 요청했다. 돈도 미리 선불해서인지, 어떻게든 좋은 노래를 받고 싶던 음반사는 김민기와 윤지영을 거의 여관에 감금하다시피 둘을 갈궜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노래는 나오지 않고, 급기야 계약일 마지막 날에 이르렀다. 윤지영이 짐을 싸고 나가려는 채비를 하고 있을 때, 김민기가 갑자기 윤지영에게 시간을 더 달라며 화장실에 들어갔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 김민기는 화장실에서 완성한 노래를 윤지영에게 보여줬는데, 이 노래가 바로 기지촌이다. 거의 하루만에, 즉석에서 작곡한 것. 사실 노래를 즉석에서 작곡하는 것은 그의 오래된 작곡 스타일이다.


노래 제목처럼, 한국전쟁과 그 이후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집창촌인 기지촌에 대한 노래이다. 지금에야 많은 집창촌에 제재가 가해지며 대다수가 문을 닫은 실정이지만, 당시에는 아예 정부 주도로 매춘이 시행될 정도로 국가가 매춘에 적극적이었다.[1] 때문에 주변에서 집창촌을 찾노라면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집창촌이 흔하고 그만큼 번성했으며, 그에 따라 미군을 상대로 매춘을 하던 집창촌인 기지촌이 많은 집창촌에 밀려 상대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 노래는 그처럼 쓸쓸하고 퇴폐적 분위기를 띠는 기지촌에 대한 노래이다. 거기에 한영애의 애달픈 목소리와 블루스 풍의 멜로디가 합쳐져 듣다보면 비애와 애수가 느껴질 정도의 분위기가 난다.

<가뭄>[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1974년 작곡된 김민기 작사작곡의 노래. 같은 해 윤지영 2집의 4번 트랙에 '산' 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수록되고, 이후 1993년 김민기 3집에 정식으로 가뭄이라는 이름으로 수록된다. 국악을 모티브로 한 타령조의 멜로디와 향토적인 가사가 어우러져, 전통적인 분위기를 조성함과 동시에 어딘가 한이 서린 느낌을 준다. 덕분에 탈북자나 정착 조선족 같은 이들이 좋아하는 노래이며, 포털 사이트 등지에서 이들이 부른 가뭄을 이따금씩 볼 수 있다. 80년대엔 민중가요로 쓰였다. 그것도 꽤 유명한. 아침 이슬처럼 민중가요로 쓰일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니라, 그야 말 그대로 가뭄과 그에 한탄하는 이들의 고난을 담아낸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군정이 들어선 대한민국의 현실이 '가뭄' 과도 같아서인지 김민기의 아침 이슬, 상록수, 친구와 함께 유명한 민중가요로 불리었다.

<식구생각>[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1993년 김민기 3번째 앨범에 수록된 곡. 작곡 자체가 완성된 것은 1975년이나, 정식 앨범에 수록된 때는 김민기가 다시 자신의 앨범을 발매한 1993년이다. 일하러 읍내에 가시는 아버지, 군대 가신 오빠, 일하러 간 언니 같은 식구들의 모습을 학교 다니는 아이의 시점에서 바라본 것 같은 가사가 일품이다. 물론 이 노래 또한 김민기의 여느 노래들처럼 깊은 사연이 숨겨져 있었으니..


사실 이 노래가 작곡된 1975년에 김민기는 카투사로 군대에 복역하고 있을 시절이었다. 그러한 그에게, 중앙정보부 요원이 김민기에게 접촉하여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반강제적으로 요청했다. 어쩔 수 없이 김민기는 한 곡을 뚝딱 지어줬는데, 그 노래가 바로 이 식구생각. 이 노래를 받고선 처음엔 중정부 요원이 갸우뚱했지만, 이후엔 바로 영창 신세를 지게 된다. 건전한 가요를 지어달라고 했는데, 사회 현실 때문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상황을 노래한 곡을 지어줬으니 어찌보면 당연하다.

<늙은 군인의 노래>[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김민기가 작사, 작곡하고 양희은이 부른 노래.

카투사로 근무하던 김민기가 수사기관의 통보로 군입대를 알게된 군의 전출 명령으로 원통의 12사단 51연대 1대대 중화기 중대로 쫓겨나서 근무하던 중 30년의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을 앞둔 병기선임하사의 요청으로 만든 노래. 막걸리 2말을 받고 선임하사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어 달라는 부탁으로 1976년 겨울 탄생한 노래가 바로 ‘늙은 군인의 노래’이다.


젊은 청춘을 푸른 군복에 바친 한 하사관 [1] 의 회한과 아쉬움, 소박한 나라사랑의 마음이 담긴 이 노래는 곧 병사들에게 구전되어 불려졌다. 그가 제대한 후 ‘늙은 군인의 노래’는 1978년 양희은의 이름을 빌려 한국공연윤리위원회(현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심의에는 통과하지만 곧 가사가 불건전하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다. 군부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이라 “흙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 내 청춘” 등의 약하고 패배주의적인 가사가 군인들의 사기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이유였다.


유신체제하에서 국방부 장관 지정 금지곡 1호가 된 이 노래가 그 생명을 이어간 것은 독재에 저항하던 대학가와 노동현장 이었다. 원래 가사속의 군인은 투사, 노동자, 농민, 교사 등으로 바뀌어 불리어지면서 대표적인 저항가요로 탈바꿈하며 오늘날까지도 애창되고 있다.


2018년 현충일 추념식에서 추모곡으로 사용되었다.

노병가, 늙은 노동자의 노래등으로 개사되어 널리 알려져 있다.

<주여, 이제는 여기에>[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1971년, 박정희의 긴급조치에 의해 운동권이 자주 열창했던 아침 이슬을 비롯한 김민기의 모든 음반, 앨범에 방송금지 처분이 내려졌다. 그런 그의 앞에 홀연히 김지하가 나타났고, 그는 김민기를 도우며, 때로는 야학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후 김민기는 스스로 김지하로 하여금 "내겐 친형 이상이었다", "나에겐 한글의 생동성을 깨우쳐 준 사람"라고 묘사할 정도로 친해졌는데, 이후 2년 뒤인 1973년에 김민기가 김지하의 연극 금관의 예수에 쓰일 노래들의 작곡을 도우면서 창작된 곡이 바로 이 곡이다. 이러한 행적을 통해 김민기는 연극, 희곡에 대한 가르침을 얻게 되고, 5년 뒤 노동 운동계에 길이 남을 명작과 그 후 다시 몇 년 뒤에는 대한민국 최다 상연 뮤지컬을 제작하게 된다.


천주교에서 금관의 예수는 예수에 대한 최대한의 영광을 나타내는 수식어이다. 물론 후술할 가사를 보면 알겠지만 이는 반어법이고, 이 노래에서의 '금관의 예수'는 '얼어붙은 벌판', '가난의 거리'의 '우리'가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며, 예수에 대한 조롱, 원망이 섞인 멸칭이다. 때문에 제목만 보고 이 노래가 찬송가인줄 알았던 이들은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와 예수를 원망하는 가사를 보고 이상함을 느끼는 경우도 더러 있다.

<봉우리>[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김민기가 작사, 작곡해 양희은이 1985년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노래.[1] 이후 1993년 김민기가 본인의 대표곡을 재녹음한 컴필레이션을 발표할 때 제목을 "봉우리"로 줄여 수록했다.


양희은은 이 곡에 대해 "김민기가 다큐멘터리 OST로 만든 거다.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때 메달을 못 따서 선수촌에도 못 남고 집으로 돌아간 이들을 위한 다큐멘터리가 제작됐다. 작가가 송지나였고, 그 주제곡으로 만든 게 ‘봉우리’였다."라고 밝혔다.라고도 했다. 처음에는 독백으로 시작하며, 김민기의 일생을 다룬 지식채널e의 마지막 부분에도 사용되었다.

<작은연못>[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김민기가 작사, 작곡해 양희은이 1972년 처음 발표한 노래. 즉 김민기 22세, 양희은 21세에 발표

한 편의 동요와 같으면서도 구슬픈 멜로디 전환이 일품인 노래이다. 하지만 이 노래가 주목받은 진정한 이유는 바로 1절의 가사 덕분인데, 연못 속에서 평화롭게 살던 붕어들이 서로 싸우다 공멸한다는 내용의 꿈도 희망도 없는 가사가 중간 부분의 어두운 멜로디와 어우러져 듣는 이에게 충격을 주었다.


당시 이 노래가 발표되었던 1970년대는 박정희의 군사독재 정권 치하 아래 수많은 노래들이 얼토당토않는 이유로 "금지곡"의 오명을 뒤집어쓰던 한국 가요계의 암흑기였는데, 이 노래 역시 바로 저 1절의 가사 때문에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정부가 이 가사에 어떤 꼬투리를 잡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 가사의 작은 연못은 "한민족"을 상징하고, 붕어 두 마리는 각각 "남한"과 "북한"을 상징한다. 남한으로 상징되는 붕어가 북한으로 상징되는 붕어를 죽여서 물이 썩어들고, 결국 둘 다 공멸하게 된다. 즉 1970년대 군사독재 정부의 극단적인 반공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 작은 연못은 "한국(남한)", 붕어 두 마리는 각각 "박정희"와 "김대중"을 상징한다. 박정희가 정적인 김대중을 몰아내기 위해 그를 암살하려 한 사건 등을 비꼬아 박정희을 비판하고 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의견이 존재하지만, 김민기가 확실히 밝힌 게 없기 때문에 어떤 뜻이 숨어있는지는 모른다.


여하튼 이 노래는 금지곡 처분을 당한 뒤에 오히려 당시의 젊은이들 사이에 널리 퍼졌으며, "상록수", "아침 이슬" 등과 더불어서 저항가요의 대표적인 존재로 자리잡는다. 이후 금지곡 제한이 풀린 뒤에는 후배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었고, 김민기의 각종 컴필레이션에도 수록되었다.


금지곡 제한이 풀린 뒤 동요(!)로서 알려졌다는 경험담이 제법 많이 등장하고 있다. 주로 80년대에 출생한 사람들로부터 그러한 증언을 많이 들을 수 있으며, 대부분이 학교에서 배웠다고 한다. 확실히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노래라고는 하지만, 어린 아이들이 듣기에는 "썩어들어가" 같이 무시무시한 가사들이 들어간 노래기에 좀 이르다는 느낌이 든다. 확실히 당시에 이 노래를 충격으로 접한 아이들이 많았는지, 지금에 들어서도 해당 부분의 가사는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당시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만화로 실리기도 하였다.

음악 인생[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❶ 음악 인생의 시작[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전라북도 이리 태생으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였는데, 6.25 전쟁 중 북으로 퇴각하던 조선인민군에 의해 살해당해 산파였던 어머니 혼자 자식들을 키워야 했다고 한다. 휴전 후 가족들과 서울로 이주했고, 재동초등학교(양희은 선후배)와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했다.


이미 중학교 시절에 미술에 뜻을 두고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자신보다 일찍 서울대학교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던 셋째 누나의 영향을 받아 우쿨렐레나 기타 등을 독학으로 익히면서 음악에서도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미술과 음악 모두 포기하기 싫었는지, 대학에 입학한 뒤 고교/대학 동창인 김영세와 도깨비 두 마리의 약자인 '도비두'라는 포크 밴드를 결성해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음악을 시작하면서 미대 수업은 아오안이 되었고, 1학년 첫 학기부터 낙제를 먹었다. 그 때문에 2학기 때 휴학한 뒤 1970년에 초기 대표곡인 아침 이슬과 가을편지(고은 작사), 꽃 피우는 아이 등을 작곡했고, 양희은과도 YWCA의 포크 동아리 '청개구리'에서 만나 공동 작업을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시인 김지하와도 만나 현실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시작했고, 솔로 1집을 발표하면서 싱어송라이터로 두각을 나타냈다.

❷ 억압으로 인해 순탄하지 못했던 음악 활동[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초기 시절부터 음악 활동은 그리 순탄치 않았는데, 1972년에는 서울대학교 문리대의 신입생 환영회 때 자작곡을 포함한 민중가요를 가르치다가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때 가르쳤던 꽃 피우는 아이가 금지곡으로 지정되면서, 음반 활동에도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1973년 초에는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의 극음악을 작곡해 무대 공연 경험을 쌓기 시작했고, 1974년 4월에는 소리굿 아구의 대본을 쓴 뒤 작곡가 이종구가 곡을 붙여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했다. 이 소리굿은 공연윤리위원회의 제재를 받고 상연 금지 처분을 당했지만,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체포 위협을 무릅쓰고 재공연하는 등 화제를 모았다.


1974년 10월에는 카투사로 입대해 군 복무를 시작했으나 1975년 초 유신 반대 운동에서 김민기의 노래들이 불렸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보안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고, 아침 이슬이 금지곡으로 지정됨과 동시에 솔로 1집도 판매 금지 조치를 받았다. 이 결정은 1987년 6월 항쟁 이전까지 지속되었고, 이후 전두환 집권기까지 공식적으로 발매된 김민기의 앨범은 전무했다.


보안대 조사가 끝난 뒤에는 영창 살이를 한 뒤 최전방 부대로 재배치되었는데, 경기고등학교 선배였던 소속 연대 수색중대장의 부탁을 받고 중대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1977년 5월에 전역한 뒤에도 공연이나 음반 발매 등 공적인 활동에 제재를 받게 되자 당시 서울대학교 미대 학장이었던 조각가 김세중의 도움으로 학사 학위와 중등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졸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졸업 이후에도 미술 활동이나 교편을 잡지 않은 채 막노동 등으로 생계를 꾸리면서 양희은의 음반 '거치른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에 들어갈 노래들을 작곡해 주었다. 하지만 음반 발매 때는 가명을 사용했음에도 수록곡 중 '늙은 군인의 노래'가 장교들의 비위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또 금지곡 판정과 음반 판금 조치를 받았다.


이렇게 되자 다른 민중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제도권 음악계의 도움 없이 비밀리에 작곡과 연주 활동을 진행했는데, 1978년에는 개신교 계열 시민단체인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의 후원을 받아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제작했다. 이 노래극은 당시 대학 노래패들의 노래와 연주로 송창식의 집에서 몰래 녹음되었고, 녹음 직후 카세트 테이프로 복사되어 보급되었다. 대담하게도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행한 작업이었는데, 당연히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지만 별 처벌 없이 풀려났다.


하지만 '공장의 불빛'을 만든 뒤에는 비공식 활동마저 힘들게 되었고, 결국 음악 활동을 일시적으로 중단한 뒤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민기를 받아준 농가에서 정기적으로 김민기의 행적을 경찰서에 보고해야 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치게 되었고, 멀지 않은 김제로 옮겨가 계속 농사를 지었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암살된 뒤인 1979년 12월에는 문화체육관에서 열린 유아원 기금 마련 자선 콘서트를 익명으로 기획하고 직접 출연도 하면서 일시적으로 음악 활동을 재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세력들이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게 되자 다시 농사를 지으며 대외 활동을 삼갔는데, 1981년 5월에는 국풍81 개최를 앞두고 정부에서 자신을 회유하려고 하자 농사일이 바쁘다면서 끝까지 참가를 거절했다. 대신 틈틈이 찾아와 농사를 도와주던 전라북도 각지의 연극패와 노래패들과 동학농민운동을 다룬 마당극 '1876년에서 1894년까지'를 만들어 전주에서 근대사 세미나와 함께 공연하기도 했다.


같은 해에는 김제에서 경기도 연천군의 전곡으로 옮겨가 참깨 농사를 시작했는데, 이 때 비료 회사에서 사익을 챙기기 위해 규정량보다 많은 양의 비료를 권장량으로 속여 판 것을 알고는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배상금을 받기도 했다. 이후에도 민통선 이북의 논에서 벼농사를 지으며 청년회를 조직해 농산물 직거래에 나서기도 하는 등, 구체적인 사회 운동에도 참가하기 시작했다.


1983년에는 2년 전 비공식 발표했던 마당극 '1876년에서 1894년까지'가 대한민국연극제 참가 작품으로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상연되었는데, 극단 연우무대 대표 오종우를 각본가로 기재하고 자신은 익명으로 연출을 맡았다. 이 때까지도 김민기는 주로 농사일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같은 해 12월에 전곡의 집이 화재로 전소되었다. 때마침 9년 전 소리굿 아구를 같이 공연했던 김석만이 김민기를 찾아와 공연 활동을 다시 재개하자고 설득했고, 결국 농부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돌아와 김석만, 오종우와 함께 어린이 뮤지컬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공연윤리심의위원회에서 김민기가 참가한다는 것을 알아채면서 수포로 돌아갔고, 1984년에는 서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를 비롯한 대학들에서 활동하던 노래패들의 노래를 모아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음반을 제작했다. 하지만 이 음반도 공윤위에서 김민기의 노래를 모두 삭제하라고 지시했고, 발매 뒤에도 어른의 사정으로 발매는 되었지만 판매가 거의 안되는 신세를 겪었다.


1985년에 뮤지컬 사무실 직원으로 일하던 이미영과 결혼했고, 1987년에는 6월 항쟁으로 본격적인 민주화 열풍이 불자 6년 전 충청남도 보령시의 탄광에서 잠시 광부 생활을 했을 때의 경험을 살려 탄광촌 아이들을 다룬 노래극 '아빠 얼굴 예쁘네요'를 만들었다. 하지만 아직 건재하던 공윤위의 꼬장 때문에 여러 대목의 가사를 고쳐서 출반해야 했다. 공윤위와의 마찰은 같은 해 12월에 노래일기 '엄마, 우리 엄마'와 훗날 록 오페라로 리메이크하게 되는 노래극 '개똥이'의 노래를 모은 음반을 낼 때도 똑같이 벌어졌다.


1989년에는 농촌 운동 경험을 살려 장일순, 박재일, 김지하, 최해성 등과 함께 생태운동 단체인 '한살림 모임'이라는 NGO를 만들어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이듬해에는 한겨레에서 발족시킨 '겨레의 노래 사업단'에서 그 동안 군사정권의 탄압 등으로 가창이 금지되어 있던 대한민국과 해외 동포들의 노래를 엮은 음반 '겨레의 노래'를 제작했고, 음반 발매 기념으로 순회 공연을 하면서 오랜만에 아침 이슬을 공개적으로 불러 화제가 되었다.

❸ 지하철 1호선, 제 2의 전성기[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1991년에는 독일의 극작가 폴커 루트비히 각본/비르거 하이만 작곡의 록 뮤지컬인 '지하철 1호선'의 한국어 번안과 연출을 담당했는데, 이 뮤지컬은 같은 해 김민기 자신이 사비를 들여 대학로에 개관한 학전 극장에서 공연되기 시작해 2008년까지 무려 18년 동안이나 상설 공연되었다. 심지어 2001년에는 독일과 중국, 일본에서 해외 순회 공연도 진행했고, 이 공로로 2007년에 독일문화원에서 수여하는 괴테 메달을 받아 한국인으로서는 윤이상과 백남준 이래 세 번째 수상자가 되었다.


1994년에는 학전 극장을 상주 공연장으로 하는 극단 학전을 창단했고, 지하철 1호선 외에 록 오페라 '개똥이'의 작사/작곡/연출과 록 뮤지컬 '모스키토', 뮤지컬 '의형제'의 번안/연출을 담당했다. 다만 극단과 극장 운영에 따른 재정난으로 인해 한참을 고생해야 했고, 이것을 타개하기 위해 1993년에 오랜만에 솔로 2집을 발매해 음악 활동을 재개했다. 다만 솔로 4집까지 낸 뒤에는 뮤지컬 등 공연예술 분야의 활동에만 주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2001년에는 1970년부터 1984년까지 작곡된 김민기의 대표곡 아홉 곡을 김동성이 관현악으로 편곡한 앨범이 발매되었고, 발매와 동시에 '클래식 김민기'라는 타이틀로 임헌정 지휘의 부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공연해 화제가 되었다. 2004년에는 공장의 불빛이 정재일과 이적, 이소은, 전인권, 이지영, 이승열 등 후배 음악인들에 의해 리메이크되었고, 1978년의 오리지널 카세트 테이프 복각본과 합쳐 두 장의 CD로 재발매되었다. 이 음반들은 그와 초기에 듀엣 활동을 했던 이노디자인 대표 김영세가 앨범 디자인을 맡았다.

❹ 근황[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1991년 이후에는 공식 석상에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극단 학전의 연출자로만 묵묵히 일할뿐, 언론사의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이나 각종 공연 섭외도 모두 거절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사람들이 아침 이슬의 김민기로만 나를 기억하는걸 원하지 않는다고 이유를 밝혔다. 즉 자신은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세상은 여전히 과거의 한순간만을 기억하면서 화석화된 김민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6월 항쟁의 마지막인 7월 7일 서울시청 광장에서의 이한열 열사 노제를 보러 갔다고 한다. 그 당시 백만 군중이 다함께 아침 이슬을 부르는 것을 듣고는 '아 이 노래는 더이상 나만의 노래가 아니구나'하고 느끼면서 이후 공식석상에서 '아침 이슬'을 부르지 않는다고 한다.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노래나 음악극 외에도 순수한 서정미가 돋보이는 노래들도 많이 작곡해 운동권이 아닌 일반 애호가들에게도 보편적으로 어필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사회적 소외자에 대한 시각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이며, 사람에 대한 연민을 그린 곡인 아름다운 사람외에 친구와 마음 터놓고 이야기하듯 털털한 어조로 부르는 '봉우리', 순수한 동경과 열정을 담담하게 표현한 '날개만 있다면'등의 노래도 유명하다.


대구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DJ 겸 음악평론가인 권오성은 김민기에 대하여 "대한민국 모던 포크가 한대수에서 시작됐다면, 대한민국적인 정서가 담긴 포크의 시작은 김민기다"는 평가를 했다. 덧붙여서 김민기는 음악이 무언지를 아는 뮤지션이며, 가사에서 보여 주는 인간에 대한 통찰이 압권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권오성은 김민기를 굉장히 좋아한다고 한다.


2018년 9월부터 지하철 1호선의 재공연을 시작. 워낙에 인기가 많던 뮤지컬이다보니 재공연 결정이 뜨자마자 관련 기사가 올라오는가하면, 배우의 면접을 위해 서류 심사를 시작한지 2주만에 100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지원하기도 했다.


2018년 9월 13일자 JTBC 뉴스룸에 출연. 지하철 1호선과 김민기 자신의 근황, 아침 이슬의 탄생 비화와 세월호 참사 때의 비화를 짤막하게 전해주고 갔다. 그가 TV 방송 인터뷰를 승낙하여 출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https://tv.naver.com/v/4043732 (인터뷰영상)

인간관계[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양희은[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재동초등학교 동창으로, 아침 이슬을 양희은에게 건넴으로써 양희은의 히트적인 데뷔에 도움을 주었다. 이외에도 양희은의 많은 히트곡들을 작곡하여 양희은이 70년대의 일약 스타로 도약하는 것에 크게 공헌했다. 사실상 지금의 양희은을 만든 것이 김민기라고 말하는 것도 과하지 않다. 양희은의 동생 연극배우 양희경과도 친분이 있다고

한대수[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행복의나라 2013' 뮤비에서 한대수가 자신과 전인권, 김민기를 '녹음불가 3형제'로 칭하고 있다. 셋 모두 이제는 나이가 들어, 현역에서 은퇴하여 더 이상 음반 녹음이 힘들다는 뜻. 김민기와는 절친한 관계. 한대수와 김민기 모두 대한민국 포크 음악을 발전시키는데에 큰 기여를 했으며, 음악이 계몽적 성향을 띠고 있는 것도 공통점이다. 1971년 김민기의 앨범에 한대수의 음악 '바람과 나' 가 실리기도 했다.

김영세[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김민기의 대학시절, 김민기가 만든 2인조 밴드 '도비두' 의 멤버였던 인물. 김민기와는 절친한 관계라고 한다. 현재는 산업 디자이너로 이노디자인의 사장을 역임하고 있다.

김지하[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김민기의 스승 같은 존재. 김민기의 인터뷰에서, 김민기가 김지하로 하여금 '우리말의 생동성을 일깨워준 형' 이라고 언급했다. 스스로 자신을 김지하의 친동생 그 이상의 존재였다고 말할 정도. 애초에 김민기는 그가 가수가 되는 과정에서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 에 쓰일 음악을 만들었기 때문에, 김지하가 자신의 인생의 갈림길에 있어서 중요한 존재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김지하가 '오적' 을 쓰고 도피하는 과정에서, 혜화동 다방에서 처음 그를 만났다고 한다. 처음 만났을 때 인상이 별로였다고. 김지하가 정치적 행보를 바꾼 일에 대해서는, '그것은 그의 일' 이라며 말을 아꼈다.

김광석[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김광석이 처음 데뷔를 하게 된 것이 김민기의 극단 '학전' 의 배우로써였다. 처음에 김광석이 김민기 앞에 왔을 때는 그를 받아주지 않았지만, 학전이 빚에 떠앉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를 불렀는데, 의외로 큰 히트를 거두었다고 한다. 땡볕 아래 사람들이 모두 학전 앞에서 줄을 서고 있었다고 할 정도. 김민기는 그를 보고 '싱어송라이터들은 대개 자신들의 노래만 진창 부르려고 하는데, 그는 다른 이들의 좋은 노래도 부르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그의 좋은 점이었다' 라며 그를 칭찬했다. 김광석 사후, 김광석 추모사업의 회장을 맡았다. 김광석 추모사업 중 하나였던 '김광석 다시부르기' 콘서트로 인하여 학전에 사람들이 쏠리니, 밖의 대형 극장으로 콘서트를 옮겼다. 한 기자가 '오는 돈도 마다하는 것 아니냐' 라고 물어보니, '나는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지, 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라고 일언했다.

송창식[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공장의 불빛을 만들 때도 송창식의 집에서 비밀리에 녹음했고, 김민기 앨범 1에 수록된 송창식 작곡의 '내나라내겨레', 송창식이 부른 김민기 작곡의 이 세상 어딘가에 등, 김민기와 굉장히 많은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둘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뉴스, 기사는 없지만 굉장히 친했던 듯. 사실 자칫 발각되면 함께 연행될 수 있었던 공장의 불빛의 녹음을 도와주었다는 것 자체가 어지간히 믿는 사이가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양희은이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송창식은 김민기에 대해 이야기하길 "아마 김민기가 세상에 나왔다면 나는 없었을 거다"라고 말했다고... 반면에 김민기는 송창식을 형님으로 칭하면서 대인이시며 자신에 대한 송창식의 평가에 매우 쑥스러워하는 인터뷰가 있다. (SBS 한수진 아나운서의 인터뷰 영상)


박정희[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대통령 박정희. 70년대 당시 김민기는 제법 유명해서, 유신 정권의 눈에는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박정희의 긴급조치에 의하여 김민기의 앨범이 금지곡으로 지정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는 악연의 시작이었을 뿐, 1975년, 김민기가 카투사로 군대에 입대했을 때, 중앙정보부 요원이 접촉하여 그로 하여금 노래를 만들어달라고 반강제적으로 요청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노래를 만들어주었는데, 이 노래가 바로 '식구생각'. 결국 김민기는 영창에 끌려가게 된다. 이 뿐만이 아니다. 그의 불온한 행각으로 인해 그는 수없이 취조실에 끌려가 고문당했는데, 사각형 각목으로 '아 내가 이제 죽는구나' 라는 생각이 날 때까지 맞았다고 한다. 이렇게나 탄압하던 김민기의 노래가 이후 민주화의 구심력이 된 것은 아이러니. 나중에 김민기는 운동권들에게 '너무 미워하지마라. 그러다 걔(박정희) 닮아간다' 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전인권[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전인권은 김민기가 프로듀싱한 겨레의 노래 음반에 참여해 '이등병의 노래'를 불렀다. 당시 곡 해석을 둘러싸고 김민기와 의견이 달랐다고 한다. 전인권에게 김민기는 우상이자 컴플렉스고 대한민국에 둘도 없는 천재다. 전인권이 필로폰 복용 혐의로 형사재판을 받을때 김민기가 증인으로 출석해 전인권에 관해 증언한 바 있다.

조용필[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음악평론가 강헌의 주선으로 조용필과 방배동 근처에서 만나 술을 마신 적이 있는데, 조용필이 노래방 기기로 아침이슬을 불렀다고 한다. 당시 만남에 대해 강헌이 과장된 어법으로 흥미진진하게 얘기한바 있다. '김민기와 조용필의 만남' - 강헌 조용필이 아무래도 김민기보다 늦은 시기에 활동한데다가 주요 음반이 현대가요이기 때문에 김민기보다 젊을 것 같지만, 알고보면 김민기가 조용필보다 1년 후배이다.

설경구[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설경구는 무명시절 지하철1호선에 출연하면서 연기경력을 쌓았고, 당시 연출자였던 김민기를 은인이라 생각한다고 한다. 설경구 말고도 황정민, 김윤석, 이종혁 등이 학전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했다고 한다.

조영남[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조영남과는 젊었을 때부터 친한 사이로 술을 같이 자주 마셨다고 한다. 조영남과 쎄시봉 멤버들이 김민기의 환갑잔치를 해주었다고 하며, 이와 관련해 조영남이 무릎팍도사에 출연했을때 전화연결로 출연한 적이 있다

최성원[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들국화의 최성원에게도 김민기는 우상이자 존경의 대상이다. 심지어 들국화 1집 이후 매니저 김진성씨와 함께 했던 이유가 바로 김민기의 음반을 제작했기 때문이라고... 더나아가 음악적 사상이나 철학에도 영향을 미친 듯 하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나 사회적 의식은 백기완 선생과 김민기 형으로 끝났다고 할 정도.

YWCA 청개구리[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김민기와 양희은이 처음 만났던… 숨막힌 청춘들의 ‘문화 비상구[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 70년대 청년문화의 중심 ‘명동 청개구리의 집’ 2013년 08월 30일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작성


1970년대는 격변의 시기였다. 냉전과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극도의 불안감이 팽배했던 당시, 자유와 평화를 외치는 반전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끓어올랐다. 그 중심에는 청년들이 있었다. 청년들을 하나로 만든 것은 모던포크와 록 같은 새로운 음악이었다. 군사정권에 의해 통제 분위기가 극에 달했던 답답한 현실에 당대의 젊은이들은 숨이 막혔다. 탈출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갈 곳이 없었다. 그 문화적 돌파구의 멍석을 서울 중구 명동1가 1-1에 위치한 서울YWCA에서 깔아 주었다. 한국 포크의 성지, 1970년대 청년문화의 중심으로 평가받는 명동 ‘청개구리의 집’이 탄생되는 시대적 배경이다. 1970년대는 기성세대들을 뒷방으로 물러나게 만든 청년들이 대중문화를 주도했던 새로운 시대였다. 청년문화는 흔히 통기타, 생맥주, 청바지로 대변된다. 그 세 가지 키워드로 당대의 청년문화 전체를 풀어낸다는 것은 언어도단이지만 그 중심에 통기타와 포크송이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지금과는 달리 당대의 젊은이들은 놀 공간이 변변치 못했기에 다양한 문화를 향유할 기회가 적었다. 이에 서울YWCA는 청소년들에게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급한 대로 직원식당을 개조해 주일을 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후 7∼9시 2시간 동안 개방했다. 43년 전인 1970년 6월 29일의 일이다.


처음 서울YWCA의 의도는 달랐다. 저소득층의 젊은이와 외국에서 여행 온 젊은이들 그리고 지방에서 여행 온 젊은이들에게 싼값으로 숙소를 제공하는 유스호스텔과 비슷한 성격의 숙소를 마련하려 했다. 하지만 기금이 확보되지 않아 젊은이들이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라도 제공하고자 안뜰 구석 큰 버드나무 그늘 아래에 있던 단층 건물을 청개구리의 집으로 개조했던 것. ‘청개구리’라는 이름은 물가에 어울리는 버드나무의 이미지, 젊은이의 반항정신, 끊임없는 도약의 의미였다.


60평이 넘는 넓은 실내 바닥에는 녹색 카펫을 깔았고 입장하는 사람은 모두 신발을 벗게 했다. 메뉴는 단 한 가지 콜라뿐이었다. 콜라 한 잔 값으로 99원을 내면 누구나 입장이 가능했다. 오후 7시 개장해 9시까지 운영된 청개구리의 집이 처음 오픈했을 때는 별다른 시설이 없었다. 의자도 테이블도 음향·조명시설도, 심지어 방석도 없었다. 창고에 카펫만 깔아놓은 소박한 풍경이었다. 손님 중에 기타를 들고 와 노래하는 친구가 생겨났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주위로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이동할 수 있는 얕고 둥근 무대 옆에는 피아노가 있었다. 이후 인테리어에 신경을 쓰면서 천장과 벽도 모두 푸른색으로 칠해졌고 유리창마다 온통 연꽃잎이 그려져 있어 아늑한 연못 속에 들어온 분위기를 연출했다.


청개구리의 집은 일주일을 단위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같이 가요평론가 이백천이 운영했던 포크살롱 ‘아베크 李’, 상설 연극프로 목요극장, 언더그라운 시네마, 클래식 음악강습회, 요리강습, 명사와의 만남, 젊은이의 광장 토론회, 각 나라 민속축제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의자도 없는 불편한 공간이었지만 아무 불평 없이 바닥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음악을 듣고 연극과 영화를 즐기며 문학과 낭만을 이야기했다. 외국 번안곡이 세상을 지배했던 그 시절, 이곳에서 우리 노래 창작운동의 불씨가 생성되었다. 아마추어 대학생 포크가수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자연스럽게 직접 그린 포스터를 붙이고 리사이틀 무대를 열기 시작했던 것. 1970년대 한국 포크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다.


이곳에서 서울미대생 김민기와 재수생 양희은의 운명적 만남이 이뤄졌다. 양희은의 첫 모습은 화려한 의상이나 외모와는 거리가 멀었다. 선머슴애처럼 청바지, 청남방, 청색 운동화 그리고 생머리에 통기타가 전부였다. 청개구리의 집 공연에 참여했던 원로 평론가 이백천의 기억이다. “양희은이 청개구리에서 리사이틀을 했던 날, 경기여고 동창생들이 몰려와 대성황을 이뤘어요. 공연 후 어땠냐고 묻기에 ‘너무 흥분한 거 아냐? 좀 들떠 보였어’라고 말했는데 ‘나 노래 안 해! 다신 노래 안 해’라고 울음을 터트려 주위 사람들이 그를 달래느라고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가 스타로 떠오를지는 꿈에도 생각 못했죠.”


당대 거의 모든 포크가수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국내 최초로 여성포크 창작앨범을 발표했던 방의경, 혼성듀엣 라나에로스포의 한민과 초대 여성 멤버 은희, 최안순, 남성듀엣 투코리언스의 김도향, 손창철, 서유석,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김영세, 사월과 오월, 이주원, 최초의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도 청개구리의 집 단골손님이었다. 이용복은 등장 자체만으로 화제가 되었지만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에 방송 출연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런 제약 없이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청개구리의 집에 매일같이 드나들었다.


1969년 서울대 회화과에 입학한 김민기는 그림물감 값이 부족해 고교동창 김영세와 ‘도깨비 두 마리’라는 뜻의 포크듀오 ‘도비두’를 결성해 대학가와 시내 음악다방에서 노래생활을 시작했다. 학업보다 음악에 더 큰 매력을 느낀 김민기는 서울YWCA 청개구리의 집 창단멤버가 되었다. 김민기는 고교동창 임문일의 소개로 재동초교 동문인 양희은과 만나 ‘아침이슬’ 같은 시대를 상징하는 명곡들을 빚어냈다. 또한 그곳에서 인연을 맺은 평론가 최경식과 기독교방송 김진성PD의 지원으로 1971년 명반으로 회자되는 첫 독집을 발표했다. 서울음대 작곡과 여대생 김광희는 김민기의 1집과 양희은의 1, 2집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힘을 보탰다. 청개구리 무대를 통해 다운타운 최고의 통기타 가수로 떠오른 양희은은 김민기와 이용복, 김광희의 도움으로 1집을 발표해 한국 포크의 대모로서 첫 행보를 시작할 수 있었다. 모두 청개구리의 집이 만들어낸 소중한 인연들이다.


1970년 소박하게 오픈한 청개구리의 집은 입소문을 타면서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6개월 후 유스센터 건립 모금을 위한 창작 포크송을 소개하는 페스티벌을 대강당에서 열었다. 평론가 최경식이 주관했던 이 공연에는 최양숙, 서유석, 김홍철,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서수남, 도비두, 라나에로스포, 에보니스, 아미고스, 미7사단 캄보밴드 등이 출연해 대성황을 이뤘다. 개관 1주년을 기념해 포크 페스티벌 ‘청개구리 사운드’를 개최했다. 이때는 서유석,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이용복, 쉐그린, 투코리안스 등이 참여해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1년 남짓 운영 후 잘나가던 청개구리의 집은 갑작스럽게 문을 닫았다. 표면적인 이유는 적자 운영이었지만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이상 현상에 군사정권은 불안했을 것이다.


청개구리의 집은 10년마다 한 번씩 부활되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1988년 ‘청개구리 마당’이란 이름으로 부활했었고 1990년대에도 이백천과 이정선이 주도해 부활 공연을 진행했었다. 디지털 세상으로 접어들기 시작한 지난 2003년에도 서울YWCA 바로 그 자리인 1층 마루홀에서 ‘청개구리 포크 콘서트’란 이름으로 부활했었다. 당시 부활 청개구리 공연은 아이돌의 댄스음악 일변도 대중문화에서 소외된 386세대 팬들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그 시절 정통 포크가수들을 다시 불러내면서 시작된 일종의 대안문화운동이었다. 필자는 한국일보 기자 시절 1년 6개월 동안 이 공연의 운영자로 일한 인연이 있다.

(= 필자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당시 매월 마지막 주 금요일 오후 8시, 서울YWCA 1층 마루홀은 100석 규모를 훨씬 넘는 180∼200여 명의 중년층이 몰려들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볐다. 때론 자리가 없어 무대 앞에 주저앉아 2시간을 버텨야 했지만, 불평 한마디 하는 법이 없었다. 1970년대 당시 포크 열풍의 중심세대였던 청년들은 어느덧 삶에 지친 중년세대로 변해 있었다. 그들이 한 달에 한 번 애오라지 포크음악에 취해 그들만의 문화를 만끽했던 것은 문화사각지대로 내몰린 소외감이 원동력이 되었다. 부활된 서울YWCA 청개구리 공연은 지친 중년들의 쉼터 역할을 넘어 포크송을 통해 젊은 세대들과의 교감이 이뤄지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청개구리 1세대 서유석, 이용복, 김광희, 방의경부터 김의철, 윤연선, 현경과 영애 박영애, 양병집, 이정선, 그리고 김두수, 이원재, 이성원, 나팔꽃 동인, 이정미, 전경옥, 손지연, 박강수, 손병휘, 손현숙 등 통기타 가수들은 포크음악의 부활을 위해 의기투합했다. 특히 이틀에 걸쳐 진행된 고 김정호의 트리뷰트 공연은 지상파 8시, 9시 뉴스를 타고 소개돼 대성황을 이뤘다. 1년 6개월 이어진 부활 청개구리 공연은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대중음악계의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결국 7080 음악 부활로 이어졌다.


‘젊은이들에게 보람 있고 즐거운 대화의 공간을 마련해 준다’는 취지로 생겨난 서울YWCA 청개구리의 집은 김민기가 만들고 양희은이 노래한 국민가요 ‘아침이슬’이 처음 발표된 한국 포크의 성지로 평가받는다. 지금은 대형건물이 들어서 사라졌지만 1층에 위치한 마루홀은 청소년들의 문화공간으로 여전히 그 역할을 이어 가고 있다.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 '도비두'와 양희은 [조선일보 = 가수 윤형주 작성 2011.08.02.][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8/01/2011080102008.html


양희은과 함께 공연한 적이 있다. 대기실에서 그녀가 불쑥 물었다.

"형, 떨리지 않아?" "아니. 그런데 긴장은 좀 되지." "형, 나는 무대가 무서워. 자꾸 떨려."


공연 시작 후 15분에서 20분 사이가 제일 힘들다고 했다. 이를 견디고 그녀는 무대에 40년 넘게 섰다.


그 40년 공연 경력 중 첫 무대는 서울 명동의 생맥주집 '오비스 캐빈'이었지만 이후 주 무대는 서울 명동 YWCA였다. YWCA에선 '청개구리'라는 노래 모임이 열렸다. 거기서 그녀는 김민기와 함께 고정 멤버로 활동했다. 그가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라는 뜻)'라는 포크 듀엣으로 활동하던 시절이었다.


양희은은 김민기의 서울 재동초등학교 1년 후배다. 물론 그땐 서로를 몰랐다. 1969년에야 서로를 알았다. 그럼에도 선후배라는 관계가 묘하게 작용했다. 둘은 친하면서도 자주 싸웠다. 어찌 보면 김민기가 양희은을 무시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김민기는 양희은을 집까지 데려다 준 뒤 걸어 자기 집으로 갔다.


둘은 특히 같이 음악할 때 더할 나위 없는 조화를 보였다. 보통 김민기가 반주하고 양희은이 노래했다. 김민기의 탄탄한 기타 주법으로 양희은의 노래는 생명력을 얻었다. 김민기가 만든 노래를 양희은이 부를 경우엔 노래의 설득력이 힘을 더했다. 김민기의 생각과 감성을 가까이서 보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활동한 청개구리는 오비스 캐빈과는 또 다른 성격의 문화 공간이자 우리 다음 세대의 주역이 모인 곳이었다. 양희은·도비두를 비롯, 남성 듀엣 아도니스, '벽오동' '언덕에 올라' 등을 부른 김도향·손창철의 '투 코리언즈', '바보처럼 살았군요' '너' '겨울아이' 등을 부른 이종용(현 미국 LA 코너스톤 교회 담임목사), 방의경, 이주호(해바라기), 이정선 등이 청개구리에서 활동했다.


이들은 우리 세대와 달랐다. 트윈 폴리오를 비롯, 조영남과 김세환 등 우리 세대는 주로 번안 가요(번안 가요 : 외국곡을 편곡하고 우리말 가사로 바꿔 한국 가수가 부르는 노래)를 많이 불렀다. 낭만주의와 통기타가 결합된 문화의 새로운 물결이었다. 반면 청개구리에선 주로 자작곡을 불렀다. 세시봉과 오비스 캐빈이 공연장에 가까웠다면, 청개구리는 발표장 성격이 강했다. 서로 노래를 부르고 생각을 나누는 대화의 장이었다. 거기서 양희은은 '세노야'를 불러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그녀를 눈여겨본 김진성 PD가 발탁해 기독교 방송 라디오프로그램 '세븐틴' DJ를 맡게 됐다.


'세븐틴' 이후로도 그녀는 40년 가까이 방송생활을 해왔다. 숱한 청취자들의 사연을 들었다. 노모의 한숨 소리, 투병 중인 환자의 탄식 소리, 넉넉지 못한 이들의 한탄 소리. 이 사연들을 듣고 전달할 때, 그녀의 목소리는 호소력이 짙다. 그녀 역시 굴곡진 인생을 살아서일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외도로 느낀 상실감, 어머니의 잘못된 빚보증으로 채권자들에게 받았던 모멸감, 동생들의 학업을 책임져야 했던 장녀의 부담감, 남의 일인 줄만 알았던 암 발병, 시한부 인생 선고. 그녀는 이를 모두 겪었다.


이뿐인가. 가수 중에 양희은처럼 금지곡이 많은 가수가 드물다. '태양은 묘지 위해 붉게 타오르고'라는 가사가 국가의 적화(赤化)를 암시한다 해 금지된 '아침이슬'이 대표적이다. '작은 연못' 역시 정확한 이유 없이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가사 중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 위에 떠오르고/여린 살이 썩어 들어가/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연못 속에선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란 부분이 있다. 이 내용이 남북한의 처절한 무력 전쟁, 박정희와 김대중의 정권 투쟁, 김종필과 이후락의 권력 암투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라는 소문만이 돌았다.


그 외에도 30곡 넘는 그녀의 곡이 금지됐다. 때론 피해 가고 가끔은 돌아가도 되련만 김민기가 만든 노래를 그녀는 조금도 수정하지 않고 불렀다. 198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녀의 곡들은 해금됐다. 이 모든 일들을 겪고도 양희은은 우뚝하다. 벌써 무너졌을지도 모르는 인생인데 아직도 달린다. 버티고 일어서고 붙들고 쉬지 않는 선머슴처럼 양희은의 삶은 밀도 높다. (…생략)

학전 소극장[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 주소 :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2길 46 삼광빌딩(동숭동)

- 전화 : 02-763-8233

- http://hakchon.co.kr/ (학전 공식 홈페이지)

- 2019.11.18. 기준 공연정보 : <지하철 1호선> 2019-10-29 (화) ~ 2020-01-04 (토)

<김광석 노래부르기> 2020-01-06 (월) ~ 2020-01-06 (월)


학전 연혁 (홈페이지 참고) http://hakchon.co.kr/?page_id=6281&place=green

김민기와 학전[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1974년 노래극 ≪공장의 불빛≫, 1978년 소리굿 ≪아구≫, 1983 연극 ≪멈춰 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를 만들었고, 1991년 ≪겨레의 노래≫의 총감독을 맡았던 그는 1990년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연출가와 공연기획자로 변신했다. 1991년 극단 학전을 설립하고 ≪개똥이≫, ≪지하철 1호선≫, ≪모스키토≫, ≪의형제≫ 등 뮤지컬과 연극을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특히 1994년 독일 원작의 작품을 번안해 연출한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2008년까지 4천회의 공연을 이어가며 국내 최장기 공연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청소년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아동극 ≪분홍병사≫, ≪도도≫, ≪우리는 친구다≫, ≪고추장 떡볶이≫ 등을 연출·제작했다. 학전 소극장을 통해 김광석, 안치환, 들국화, 동물원 등을 비롯한 가수들의 소극장 라이브콘서트 무대를 만들며 한국 대중문화의 지평을 넓혔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민기 [金民基] (두산백과)

학전 출신 뮤지션 관련 기사[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Again, 학전 콘서트’, 3월 29일부터 5월 19일까지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2019년)

https://blog.naver.com/ostw/221492838889


[서울문화인] 1960~70년대 무교동에 포크 음악의 산실이었던 음악다방 쎄시봉을 통해 한국 음악계에 포크 열풍을 이끌었다면 90년대는 1991년 대학로에 개관한 학전을 들 수 있다.


1990년대 들면서 댄스 음악과 아이돌문화라는 새로운 바람이 대중음악계에 불어오자, 통기타를 들고 노래하던 가수들은 점차 설 곳을 잃어갔다. 이에 학전 김민기는 ‘무대’를 찾아 헤매는 이들에게 학전이라는 공간을 제공했고, 김광석을 필두로 노찾사, 노영심, 권진원, 강승원 등 포크 음악을 하는 가수들이 하나 둘 학전으로 모여 들었다.


학전에 모인 아티스트들은 관객과 가까운 곳에서 함께 이야기 하고 교감하는 본격적인 라이브 음악 문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 이전과는 완전히 새로운, 관객들이 오롯이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는 새로운 공연 환경이 만들어지면서 수많은 뮤지션들이 라이브 콘서트를 진행, 라이브 공연의 발원지이자 대중음악계의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간 대한민국 문화 예술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상징적인 공간이 되었다.


이후, 학전을 시작으로 대학로 일대에는 라이브 콘서트를 전문으로 하는 공연장이 생겨났으며, 그 흐름이 현재 홍대 인디밴드들의 주 무대가 되고 있는 라이브 공연장으로까지 이어졌다.


1990년대 학전의 이곳을 무대로 활동한 뮤지션들로는 노찾사, 김광석, 유재하, 들국화, 노영심의 작음 음악회, 안치환, 윤도현, 강산에, 권진원, 정원영, 동물원, 박학기, 장필순, 일기예보 등 셀 수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곳도 변화를 맞이하며 라이브 콘서트는 찾기 힘들어졌다. 이런 가운데 2012년 학전 개관 30년을 앞두고 지난해 ‘지하철 1호선’에 이어 과거 이곳을 추억하는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하는 ‘Again, 학전 콘서트’로 관객들과 다시 만난다.


‘다시’라는 타이틀이 붙은 만큼, 이번 콘서트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아티스트들은 학전에서 숱한 라이브 콘서트를 진행한 바 있는 뮤지션으로 채워졌다. ‘Again, 학전 콘서트’는 3월 29일 전인권(3/29-4/3)을 시작으로 김수철(4/5–4/7), 김현철(4/9–4/10), YB(4/12–4/14), 권진원(4/16-4/17), 안치환(4/19–4/21), 웅산(4/23–4/24), 강산에(4/26–4/28), 유재하 동문회(4/30–5/2), 정원영(5/4–5/5), 푸른곰팡이(5/7-5/8), 김광민(5/10-5/12), 노영심(5/13–5/15), 김광석 다시 부르기 팀(박학기/유리상자/한동준/동물원/자전거 탄 풍경 /장필순)(5/17-5/19)까지 라인업만으로도 전율을 주는 14팀의 아티스트+게스트 뮤지션이 참여하는 릴레이 공연으로 진행된다. 14팀의 아티스트는 학전과, 김민기라는 두 단어의 의미와 깊이를 이해하며 기꺼이 소극장 콘서트에 함께 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고 한다.


학전 김민기 대표는 ‘200년대 들어서 라이브 공연을 거의 올리지 못하였다. 이번 콘서트는 과거 30주년과 다가올 30주년을 생각하자는 의미에서 라이브 콘서트의 발원지의 상징성을 알리기 위해 기획되었다’고 전하며, ‘이번 기회를 통해 학전이 뮤지컬, 연극뿐 아니라 콘서트까지,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어우르는 복합문화예술공간이라는 상징성을 보다 확고히 하고자 한다’는 뜻을 전했다.


덧붙여 박학기 “김광석 콘서트를 실무를 준비하고 있어 김민기 선배와는 많은 얘기를 주고받고 있는 가운데 어느 날 전인권 선배와 함께 얘기를 나누다가 이번에는 뭔가 원점으로 돌아가 좋은 공연을 하자라는 의견이 나와서 이번 콘서트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밝혔다.


콘서트에 앞서서 가진 간담회를 통해서 대부분의 뮤지션은 ‘초창기 학전에서 시작하여 이곳은 고향과 같은 존재이다’라는 소감을 밝히면서 좋은 취지로 공연을 하게 된 것에 기쁨을 표시하였다.


그리고 학전과의 인연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밝혔다. 권진원은 “저에게 학전은 음악의 고향이라 할 수 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활동 이후에 학전에서 첫 단독공연을 했다. 95년 4월 11일부터 16일까지 했는데 이번에 16일부터 17일 하게 되어 음악과 시간이 연결되는 기분이다”고 밝혔다.


YB 윤도현은 “저는 파주가 사람이라 자주 올 수 있는 곳이라 아니라 대학로는 제게 꿈같은 곳이었다. 제가 인디포크그룹 ‘포크연’에서 기타와 키보드를 맡고 있었을 때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게스트로 처음 이곳 무대에 섰었는데 그때 노래도 하지 않고 연주만 했지만 제가 꿈을 하나 이뤘다는 마음에 친구들에게 내가 중앙무대에서 노래했다고 얘기하고 다녔다. 이후에 데뷔도 하기전인데 (김)광석이 형 공연에 게스트로 세워주셨고, 권진원 누나 공연 때 게스트로 나온 것을 김민기 선생님이 보시고 저를 뮤지컬 계통에 출연할 기회를 주셔서 저에게는 꿈의 장소의 느낌이다.”


이어 스윗소로우의 김영우는 “처음 본 콘서트가 대학교 때 저기 C열에서 지금은 헤어진 여자 친구와 찾았었다. 그때 공연은 들국화 공연이었다. 그때는 제가 음악을 할지 몰랐다. 그런데 지금 존경하는 선배들과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학전이 버텨서 다리가 되어준 것 같다.”며 학전과의 인연을 얘기했다.


또한, 공연에 앞서 어떤 무대를 선보일지 살짝 밝히기도 했다. 먼저 전인권은 “히트곡 보다는 신곡을 발표할 예정이며, 신곡은 제 의견 같은 것을 멜로디에 싫은 노래이다. 그리고 김민기 선배의 노래도 할 계획이다”며, 7인조 밴드의 풍부한 사운드를 통해 록 음악의 진수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특별한 무대로 꾸며질 예정이다.


이어 YB밴드 윤도현은 “미발표앨범 10집의 노래부터 데뷔의 앨범까지 현재의 YB에서 점점 과거로 돌아가는 데뷔 앨범의 노래 순으로 들려줄 예정이다. 그리고 저희 공연에서는 관객들과 얘기를 할 기회가 적었다. 예전에는 멘트를 정말 못해서 멘트가 산으로 갔는데 이번에는 많이 준비해서 이번에는 장소가 학전이고 해서 관객들과 많은 얘기를 나눌 생각이다”고 밝혔다.


92년에 데뷔하고 이곳에서 여러 번 공연했다는 강산에는 “키보드, 일렉트릭기타. 어쿠어스틱기타 세 명이 연주하는 공연이 될 것이다. 여러분이 잘 아는 곡을 비롯하여 예전에 사전심의에 허가를 받지 못한 곡까지 두루두루 들려드릴 계획이다”, 이어 유재하 동문회으로 진행하는 스윗소로우의 김영우는 “유재하 음악경연대회가 올해로 30주년 되기 때문에 한 해 10명만 잡아도 300팀이 어떤 팀을 선정할까 고민이 되었는데 김민기 선생님이 어린 새싹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은 어떨까 하여 작년 수상자부터 여러 팀이 패기 있게 준비하고 있다”


강산에와 더불어 8년 만에 다시 학전 무대에 서는 권진원은 “제 공연에는 후배 게스트가 있다. 첫째 날은 제주소년에 박경환이 둘째 날은 이정화가 출연할 예정이다”, 푸른곰팡이의 조동희는 “이번에 5개 팀이 함께 한다. 그들과 각자의 노래 함께 부르는 노래까지 소극장의 아기자기하고 따뜻한 노래로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자전거 탄 풍경의 강인봉은 “혹시나 이 공연이 추억 팔이가 되지 않을까 그런 고민이 있었다. 이 공연은 정체되어 있는 것을 보여 드리는 것이 아니라 10대부터 60대까지 좋은 음악으로 다가가서 그들이 이해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신곡과 함께 새로운 시도도 많이 보여드릴 예정이다. 관객의 많고 적고 흥행을 떠나서 멋진 공연이었다. 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그리고 제 타깃은 일반 관객들이 아니라 후배 가수들이다. 형들이 모여 하는 것이 멋지구나. 후배들이 나도 저 자리에 한 번 해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도록 멋진 공연을 보여주겠다”고 밝혔다.


‘Again, 학전 콘서트’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마무리 할 김광석 다시 부르기 팀의 박학기는 “마지막 3일간 공연하는 ‘김광석 팀’은 두 팀씩 나눠서 콜라보를 진행한다. 각자의 노래도 하지만 전체는 김광석이라는 틀에서 놓고 본인이 해석한 김광석 노래로 진행할 예정이다. 그리고 5월 19일은 6명의 가수와 함께 아마추어부터 프로까지 참여하는 ‘김광석 노래부르기’의 입상자들이 하루에 한 팀씩 함께 하며, 이번 콘서트에 참여하는 뮤지션들도 게스트로 참여할 예정이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간담회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노래하는 음유시인 안치환은 ‘안치환과 자유’로 밴드 공연을 선보이며, 재즈 아티스트 웅산 역시 이번이 학전과의 첫 만남을 통해 장르의 다양성과 새로운 시도에 의미를 보태주며 콘서트를 풍성하게 채워 줄 예정이며, 학전과 오랜 인연을 자랑하는 뮤지션 정원영은, 피아니스트 정원영이 아닌 정원영 밴드로 오랜만에 밴드 사운드를 선보이고, 재즈 아티스트 김광민은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함께 하는 감성적인 공연을, 음악 토크쇼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가 오랜만에 학전에서 다시 올라간다. 노영심은 3일간의 공연을 통해 작은 음악회뿐 아니라 뮤지션 노영심으로서의 면모를 오랜만에 대중들 앞에 선 보일 예정이다.


또한, 오랜만에 대중과 소통하게 될 데뷔 42주년을 맞이한 ‘작은 거인’ 김수철을 빼놓을 수 없다. 김수철은 “나두야 간다”, “젊은 그대”, “못 다 핀 꽃 한 송이” 등 숱한 명곡을 남겼고, 음악 뿐 아니라 영화음악, 국악작곡집, 무용음악, 86 아시안게임 음악, 88 올림픽 음악, 2002 한일월드컵 개막식 등의 국제적인 행사음악 작곡과 음악 감독을 통하여 독보적인 음악세계를 구축해왔다. 이처럼 김수철은 단순히 가수가 아니라, 작곡가, 연주인, 음악감독, 문화위원, 국악인, 영화배우 등 모든 예술 장르에 탁월한 감각을 보이는 ‘종합 예술인’ 이라 할 수 있다.


오랜만에 학전블루로 돌아온 이번 공연에서도 그의 종합예술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김수철은 이번 공연의 타이틀을 ‘음악 이야기 두 번째’ 라고 확정 지었다. 음악 이야기는 김수철이 1992년, 학전 소극장에서 토크콘서트 형식으로 열흘 동안 총 22회 강의를 한 <김수철의 음악 이야기>의 두 번째 버전이다. 김수철이 자신이 선정한 노래를 부르며 관객들에게 그 곡에 대해 설명하는 뮤직 토크쇼 형식으로 진행된다. 김수철 콘서트는 오는 4월 4일부터 4월6일까지 3일간 진행 된다. 금요일은 8시, 토요일은 7시 30분, 일요일은 6시에 1일 1회 공연된다.


[출처] [공연] 라이브 콘서트 문화의 발원지 학전의 뮤지션들이 뭉쳤다. ‘Again, 학전 콘서트’|작성자 페르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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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70년대의 상징,‘아침이슬’의 김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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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70년대의 상징,‘아침이슬’의 김민기(1)

입력 : ㅣ 수정 : 2006-08-16 16:33

   

일기쓰듯 읊조렸던 노래가 이유없는 사슬에 신화가 되다

젊은 시절, 캠퍼스 어느 구석에선가 그의 노래를 숨 죽여 불러본 경험을 가진 이들에게 김민기가 ‘추억‘이라면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김민기는 ‘70년대의 역사’일 것이다.


광주의 경험을 가진 80년대 이후 젊은이들은 ‘산 자여 따르라’라고 외쳤지만 김민기의 노래는 어디까지나 70년대의 노래다. 즉 ‘나 이제 가노라’라고 읊조리던.

김민기.png

▲ 김민기


70년대 젊은이들에게 김민기는 ‘노래하는 이’였고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김민기는 극단 ‘학전’의 대표이자 연극 연출가, 기획자로 더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인생 2모작’에 몰두하고 있는 그는 이제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다.12년 째 달려오고 있는 ‘지하철 1호선’은 어느덧 공연 3000회를 훌쩍 넘겼다.


70년대 젊은이들에게조차 그의 실체는 가늠이 어렵다. 한동안 ‘금지’에 묶이고 ‘상징’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동안 ‘구전’의 문화로만 존재해왔고 그래서 그의 존재는 많은 이들에게 ‘신화’에 가까웠다. 자의건 티의건 간에 70년대 문화의 큰 흐름을 주도해온 김민기의 노래 작업들은 우리 현대사의 가장 치열한 기록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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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기 첫 독집음반, 1971년.


감시와 검열과 통제의 시대, 그러나 당시 금지곡 목록에 올려져 있던 김민기 곡은 ‘아침이슬’ 단 한 곡뿐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다른 곡들과는 달리 아무런 금지 사유도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만든 노래들은 일순간 방송에서 모조리 자취를 감춘다. 노래가 아니라 이름 자체에 금지의 굴레가 씌어져 있었던 탓이다.


‘우리나라 70년대는 김민기의 아침이슬로 시작되었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대중들과 평론가들로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의식 있는 젊은이’ 김민기, 그는 경기중·고교와 서울대 미대를 나온, 속칭 ‘KS 마크’였다. 아울러 그림과 음악을 사랑하던 청년이었다.


비록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고교 시절인 67년, 그가 처음 만든 노래가 ‘가세’이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노랫말은 이렇다.‘비가(눈이) 내리누나/나 혼자 가고프나/함께 어울려 간들 어떠하리/가세 산 너머로 비 개인(눈 그친) 그곳에/저 군중들의 함성소리 들리쟎나’이다.


이어 만든 곡이 ‘친구’. 이 노래는 고교시절 보이스카우트 대원들과 동해안 여름야영에 갔던 68년. 친구 하나가 익사하자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서울로 돌아오는 야간열차 안에서 자신의 심경을 그린 것이다. 서울대 시절, 동료 김영세씨와 듀엣으로 활동했던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라는 뜻)’의 목소리에 실려 처음 음반으로 발표되었다.

금지곡 목록.png


▲ 당시 금지곡 목록.‘아침이슬’은 다른 노래와는 달리 아무런 금지사유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당시 그가 만든 노래들은 ‘친구’ ‘아침이슬’을 비롯해 ‘작은 연못’ ‘길’ 등 매우 서정적이고 담백하다. 그저 일기 쓰듯 담담하게 노래했다. 때문에 당대 젊은이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끌어냈던 것이리라. 그 자신 스스로도 ‘그저 나의 작은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로 지나치게 확대 해석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렇게 만들지 않았는데, 그렇게 불려진 것이라는 얘기다.


그의 노래들이 금지된 것은 노래 자체 때문이라기보다 그가 관여한 실천적 참여활동 때문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는 72년 봄, 서울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 초대되어 ‘우리 승리하리라’ ‘해방가’ 그리고 ‘꽃피우는 아이’를 불렀다는 이유로 이튿날 새벽, 동대문경찰서에 연행되고 시중에 남아 있던 그의 음반들은 모조리 압수당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그가 후에 수도 없이 되풀이하게 되는 ‘연행’ 행로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일을 겪고 난 후 야학이나 ‘금관의 예수(73)’ 소리굿 ‘아구(74)’ 등 가톨릭 문화운동, 국악대중운동, 마당극 등에 관심을 가지며 이러한 활동에 깊게 관여하게 된다.‘의식 있는 젊은 한국인’이 한층 ‘줏대 있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그의 노래는 방송가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더욱 유명해져가고 있었다. 그는 74년 군에 입대한 후 77년 제대하면서 ‘야인’으로 생활을 시작한다.


70년대 김민기에 대한 당국의 시각은 어떠했는가. 그 일화 중 하나.


김민기는 당시 모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다. 수사관은 그에게 대외비 책자 한 권을 펼쳐보였다. 그 책자에는 당시에 대학가에서 주로 불려지던 과거 독립군가나 빨치산들이 불렀을 법한 유형의 작자 미상의 노래들이 김민기라는 이름으로 적혀 있었다. 이윽고 ‘아침이슬’ 부분을 펼쳐보였다. 첫 낱말 ‘긴 밤’에 밑줄이 그어있고 ‘유신체제’라는 설명이 붙어있었다.‘풀잎’ ‘이슬’ ‘태양’ ‘묘지’‘광야’ 등등. 단어마다 빨간 주석의 장황한 해설들. 그가 다그쳤다.‘긴 유신체제의 밤을 끝내고 민족의 태양인 김일성을 열렬히 맞이하자.’라는 내용이 아니냐는 거였다. 이 노래를 만든 것이 71년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킨 김민기는 되물었다.“10월 유신이 몇 년도였지요?”


이에 수사관은 대답 대신 인상을 찡그리며 책을 탁하고 큰소리나게 덮었다.(계속)

sachilo@empal.com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70년대의 상징,‘아침이슬’의 김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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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년 첫 독집음반을 발표했던 김민기는 오랜 '금지'의 굴레에서 벗어나 22년만인 93년, 넉 장의 앨범 '김민기 1, 2, 3, 4집'을 동시에 발표하며 대중들 앞에 돌아온다.


"그동안 많은 이들에게 진 빚을 갚는 심정으로 음반을 냈다'는 것이 당시 본인과느이 인터뷰에서 한 첫마디였다.


그는 이 음반을 통해 그동안 자신에 대한 과장된 평가, 아울러 신비주의와 편견 등을 불식시키기 위해 처음 만들었던 악보 그대로 노래를 부름으로써 '노래의 제 모습'과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주고자 시도했다고 밝혔다.


[한국가요연대사] 022. 70년대의 포문을 연 가수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0191250&memberNo=2301197&vType=VERTICAL


중학교때부터 미술만 하던 학생 . 그래서 경기고 , 서울대  (KS 마크 출신이네 )에서도 미술만 한 학생이 있었다 . 70 년 , 19 살에 동창 Y 양에게 노래를 하나 주어서 그것이 그녀의 데뷔음반이 된다 . 미술 전공자의 첫 작사 , 작곡한 음악이 바로  Y 양이 부른  ‘아침이슬 ’이 다 . 이 정도하면 가수는 양희은이고 , 이 미술쟁이가 바로 김민기다 . 오늘의 주제인 70 년대의 음악을 연 사람이다 .


이후 1972 년 서울대 문리대학 신입생 환영회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이로 인해서 경찰서에 잡혀가고 그의 모든 음반이 금지곡이 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는데, 이러한  민주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싱어송라이터 김민기였다.


1973 년 초에는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 '의 극음악을 작곡해 무대 공연 경험을 쌓기 시작했고 , 1974 년  4 월에는 소리굿 아구의 대본을 쓴 뒤 작곡가 이종구가 곡을 붙여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했다 . 이 소리굿은 공연윤리위원회의 제재를 받고 상연 금지 처분을 당했지만 ,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체포 위협을 무릅쓰고 재공연하는 등 화제를 모았다 .

 

1974 년  10 월에는 카투사로 입대해  1977 년  5 월에 전역한 뒤에도 공연이나 음반 발매 등 공적인 활동에 제재를 받게 되자 당시 서울대학교 미대 학장이었던 조각가 김세중의 도움으로 학사 학위와 중등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졸업할 수 있었다 .


하지만 졸업 이후에도 미술 활동이나 교편을 잡지 않은 채 막노동 등으로 생계를 꾸리면서 양희은의 음반  '거치른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 '에 들어갈 노래들을 작곡해 주었다 . 하지만 음반 발매 때는 가명을 사용했음에도 수록곡 중  '늙은 군인의 노래 '가 장교들의 비위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또 금지곡 판정과 음반 판금 조치를 받았다 .


이렇게 되자 다른 민중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제도권 음악계의 도움 없이 비밀리에 작곡과 연주 활동을 진행했는데 , 1978 년에는 개신교 계열 시민단체인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의 후원을 받아 노래극  ‘공장의 불빛 ’을 제작했다 . 하지만  '공장의 불빛 '을 만든 뒤에는 비공식 활동마저 힘들게 되었고 , 결국 음악 활동을 일시적으로 중단한 뒤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암살된 뒤인  1979 년  12 월에는 문화체육관에서 열린 유아원 기금 마련 자선 콘서트를 익명으로 기획하고 직접 출연도 하면서 일시적으로 음악 활동을 재개하기도 했다 .

 

하지만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세력들이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게 되자 다시 농사를 지으며 대외 활동을 삼갔는데 , 1981 년  5 월에는 국풍 81  개최를 앞두고 정부에서 자신을 회유하려고 하자 농사일이 바쁘다면서 끝까지 참가를 거절했다 .

 

1983 년  12 월에 전곡의 집이 화재로 전소되었다 . 때마침  9 년 전 소리굿 아구를 같이 공연했던 김석만이 김민기를 찾아와 공연 활동을 다시 재개하자고 설득해 농부생활을 청산하고 어린이 뮤지컬을 만들기 시작했다 . 그러나 이또한 수포로 돌아가고  1984 년에 서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를 비롯한 대학들에서 활동하던 노래패들의 노래를 모아  '노래를 찾는 사람들 '이라는 음반을 제작했다 . 김민기의 사상적 성격을 잘 살펴볼 수 있는 곡들이 많다.


1989 년에는 농촌 운동 경험을 살려 장일순 , 박재일 , 김지하 , 최해성 등과 함께 생태운동 단체인  '한살림 모임 '이라는  NGO 를 만들어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 이듬해에는 한겨레에서 발족시킨  '겨레의 노래 사업단 '에서 그 동안 군사정권의 탄압 등으로 가창이 금지되어 있던 대한민국과 해외 동포들의 노래를 엮은 음반  '겨레의 노래 '를 제작했고 , 음반 발매 기념으로 순회 공연을 하면서 오랜만에 아침 이슬을 공개적으로 불러 화제가 되었다 .

 

1991 년에는 독일의 극작가 폴커 루트비히 각본 /비르거 하이만 작곡의 록 뮤지컬인  '지하철  1 호선 '의 한국어 번안과 연출을 담당했는데 , 이 뮤지컬은 같은 해 김민기 자신이 사비를 들여 대학로에 개관한 학전 극장에서 공연되기 시작해  2008 년까지 무려  18 년 동안이나 상설 공연되었다 . 2007 년에 독일문화원에서 수여하는 괴테 메달을 받아 한국인으로서는 윤이상과 백남준 이래 세 번째 수상자가 되었다 .

 

1991 년 이후에는 공식 석상에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 극단 학전의 연출자로만 묵묵히 일할뿐 , 언론사의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이나 각종 공연 섭외도 모두 거절하고 있다 . 이에 대해서  ‘사람들이 아침 이슬의 김민기로만 나를 기억하는걸 원하지 않는다 ’고 이유를 밝혔다 . 즉 자신은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세상은 여전히 과거의 한순간만을 기억하면서 화석화된 김민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


[오늘의 역사]8월28일:독재권력에 눈엣가시... ‘아침이슬’ 무슨 죄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4923022&memberNo=3506482&searchRank=28

2016.08.28. 10:41 184 읽음


1970년 김민기 ‘아침이슬’ 발표

민중의 애환과 저항을 담은 노래는 강하다.


탄압의 총칼 앞에서도 굽힐 줄 모르고 민초들의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잠자던 그들의 의식을 일깨우기도 한다. 권력자들에게는 그 어떤 비난의 말보다 두려운 존재다. 그것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한낱 노래에 지나지 않지만, 통제하고 금지하는 이유다.


일제시대 때 잃어버린 나라에 대한 독립을 열망하는 노래를 금기시했고, 박정희 정권과 5공 신군부 시절, 독재에 항거하는 상징적인 노래에 철퇴를 내리기도 했다. 예술적 표현의 자유가 무시된 채 어떤 곡은 저속, 퇴폐하다는 이유로 입에 담아서는 안됐다.


1970년 8월 28일 ‘오늘’ 발표된 ‘아침이슬’도 그중 하나였다.


김민기가 작사, 작곡한 이 곡은 1973년 정부에서 주는 아름다운 노랫말로 ‘건전 가요상’을 수상했지만, 상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인 1975년 유신정부에 의해 금지곡이 됐다. 그 이유라는 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그냥 금지’였다.

김민기와 양희은.png


▲ ‘아침이슬’을 부른 양희은의 앨범과 1970년대 초 기독교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김민기(사진 왼쪽)와 양희은 모습/사진=유튜브. 신동아


당시 금지된 곡들은 방송 부적합이라는 이유가 적용됐는데, 그 면면을 보면 헛웃음이 나올 법한 꼬리표가 붙어있었다.


가수 송창식의 대표곡인 ‘왜 불러’는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서 장발족 단속을 피해 도망가는 장면의 배경음악으로 쓰였는데, 이는 정부 정책에 대한 반항의 상징으로 인식돼 ‘괘씸죄’에 걸렸으며, ‘고래사냥’은 자살 장면이 퇴폐, 염세적이라 해서 금지됐다.


신중현의 노래 ‘미인’은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라는 가사를 대학가에서 대통령의 권력욕에 빗대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로 개사해 부른 것이 화근이 됐다. 더 우스웠던 것은 지금 국민가수로 통하는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왜색이라는 이유로 방송금지시켰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 노래를 즐겼다고 한다.


이유 같지 않은 이유라고 해도 다 사연 있던 금지곡이었는데, ‘아침이슬’의 금지는 도통 가늠할 수가 없었지만, 세간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가사가 불순하다’였다. ‘긴 밤 지새우고’의 ‘긴 밤’이 유신을 나타내며,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의 ‘붉은 태양’은 ‘위대한 지도자이며 민족의 태양인 김일성’을 연상케 한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런 억지 춘향 같은 이유 때문에 노래의 생명력은 더욱 길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오랫동안 입에 담지 못 했던 노래들은 1987년 6월 항쟁과 함께 해방을 맞이했다. ‘노래 민주주의’를 맞이한 지 29년이나 흘렀다. 그 긴 시간 속에서도 아직도 우리에게는 금지되는 노래가 있다. 2016년 5월 18일.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에 불거진 ‘임을 위한 행진곡’ 논란은 그래서 씁쓸하다./

‘아침이슬’ 김민기 “세월호, 나는 그 죽음을 묘사할 자격이 없다”

등록 :2015-04-10 19:05 수정 :2015-12-22 15:03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86352.html

첫 인터뷰 날이었던 지난달 24일 오후 김민기 극단 학전 대표가 서울 대학로 학전 소극장 내 관객석에 앉아 포즈를 취했다. 김 대표는 “어색해 미치겠으니 빨리 끝내 달라”며 사진기자를 독촉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아침이슬 그 사람’ 김민기 (하)

학전이 세 든 건물 4층에 위치한 김민기의 사무실은 극단 대표의 집무실이라기보다는 은거하는 수도자의 토굴 같았다.

91년 학전 개관 때부터 지금까지 그가 기획하고 제작한 각종 공연물 자료와 참고서적이 사람 하나 겨우 지나다닐 만한 통로만 남겨두고 천장까지 가득 찼다.

높다란 책장이 창을 가려 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안쪽 구석, 두어 평 남짓한 공간에 그의 책상과 컴퓨터, 간이침대가 놓여 있었다. 1985년 아동극 준비 과정에서 만난 이미영과 결혼한 뒤,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지만 그는 주말에도 사무실에 틀어박혀 지낼 때가 많다고 했다. 가정적인 아빠는 못 될 것 같은데 학전 안에서는 ‘아들 바보’로 소문이 나있다고, 곁에 있던 직원 하나가 귀띔을 해준다.

아버지의 미술적 재능을 물려받은 덕일까? 아들 둘 모두 건축과 디자인을 전공해서 대학 졸업 뒤 디자인회사를 차리더니 요즘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닌다”고 말하는 김민기의 말투에도 은근한 아들 자랑이 묻어난다. 비좁은 공간에 어지럽게 놓인 물건들을 대충 치우고 앉을 자리를 만들어 김민기와의 2차 인터뷰를 시작했다.


중정에서 원하는 노래 안 만들어 영창으로


-사무실에 기타가 안 보인다. 기타 안 치시나?

“미쳤어?”


그가 짐짓 퉁명스럽게 질문을 걷어냈다. 다시 둘러보아도 기타나 키보드 같은 건 눈에 띄지 않는다.


-기타도 없고, 노래도 안 만드시고….

“학전 열고 지금까지 해온 (뮤지컬 번안곡) 작업들이 다 노래하고 관련된 건데 뭐.”


-왜 대중가요는 더 이상 만들지도, 부르지도 않으시나? 다방 같은 데서라도 당신 노래가 나오면 진저리를 치며 뛰쳐나간다는 일화가 있던데. 노래 때문에 겪은 고초 때문인가?

“그건 아니다. 난 내 노래를 듣기 싫은 게, 오래 입다 벗어놓은 내복 같단 말이야.”

-당신 노래로 청춘을 보냈던 사람들에겐 각별한 추억이 담긴 곡들이다.

“다시 ‘쟁이’ 얘길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쟁이는 어제 했던 작업을 부정해야 해. 안 그러면 새로운 걸 할 수가 없어.”

-꼭 그래야 하나? 화가 중에도 물방울이나 꽃 그림만 연작으로 그리는 사람이 있고, 판소리 오래 하시는 분 중에도 주요 레퍼토리가 하나로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분도 있지만 난 그런 데 익숙해지고 싶지가 않아. 계속 더 찾아보고 싶어, 새로운 걸.”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오신 것 아닌가? 새로운 걸 찾아다니는?

“그렇게 살았지.”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통기타 싱어송 라이터로 음악을 시작했지만 71년 이후 김지하, 임진택, 채희완, 김영동, 이애주, 김석만 등을 만나면서 판소리와 전통연희의 형식을 되살려 마당극의 효시가 된 <소리굿 아구>(1974. 대본 김민기)를 만들었고 78년에는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작곡, 제작했다. 90년에는 상업적 음악유통망에서 소외되어 있던 한민족의 노래를 대대적으로 발굴 수집하는 <겨레의 노래>(주최 한겨레신문) 사업을 감독했고 91년 학전 설립 이후에는 록 오페라, 록 뮤지컬 등 다양한 공연 형식을 선보였다.


음악적인 실험보다 더욱 파격적인 것은 그의 삶이었다.

‘아침이슬’과 ‘상록수’가 저항가요의 상징이 된 것은 그걸 지은 사람이 김민기였기 때문이고, 김민기 스스로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깨치고 나가”는 삶이 무언지 보여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72년 그의 앨범이 압수되고 그의 노래가 금지되었을 때 김민기의 나이 고작 이십대 초반, 아직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을 때였다. 그는 여전히 젊은이들의 우상이었고 그의 통기타 친구들은 주류 문화계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기타 치고 노래하던 “미대 형”이 선택한 길은 그러나 무대도, 화단(畵壇)도 아닌 세상에서 가장 낮은 삶의 현장이었다. 20대 중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김민기는 공장 노동자로, 건설현장 노가다로, 탄광 광부로, 농사꾼으로 살았다.


-71년에 음반을 낼 때는 전업가수가 될 수도 있다 생각한 것 아닌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닥치는 대로 다 하려고 했어. 근데 그 71년 판이 압수되면서부터는 상황이 달라진 거야.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된 거지.”


-학벌 좋고 인맥 좋아서 원한다면 얼마든지 소시민적으로 살 수 있는 조건이었을 텐데.

“소시민적으로 살았지.”


-교사자격증도 있었지 않나? 정보기관에 찍혀서 취직이 어렵다 해도 미술학원 강사나 반주자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런 노래 만들어라’ 했을 때 내가 응했다면 아마 전혀 다른 길로 풀렸을 거야. 당시에 난 제법 유명한 놈이었으니까. 군대에 있을 때 그런 경험이 있다.”


74년 카투사로 입대한 그가 처음 배치된 곳은 미군방송국(AFKN)이었다.

비교적 편안한 군 생활을 하던 75년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보안부대에 소환되어 중앙정보부 요원을 만나게 된다. 중정의 학원 담당이라는 자가 그에게 지시한 것은 “노래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노래를 만들면 편안하게 해준다. 지금 제대를 시켜 줄 수도 있다”면서. 김민기의 음반을 압수하고 금지하는 것만으로는 유신 반대 집회마다 그의 노래가 불리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되자, 김민기 자체를 권력 편으로 ‘압수’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때 김민기가 지은 노래가 ‘식구생각’이다.

분홍빛 새털구름 하하 고운데/ 학교 나간 울 오빠 송아지 타고 저기 오네/ 읍내 나가신 아빠는 왜 안 오실까?/ 엄마는 문만 빼꼼 열고 밥 지을라 내다보실라.(‘식구생각’, 1975년 작)


-중정요원이 황당했겠다!

“군대에 있는데 내가 뭐 거부를 할 수 있나? 만들라 하니 만든 거지. 근데 아무리 걔들이 요구해도 내 속에서 나오는 게 그거밖에 안 되는데 어쩌라고?”


김민기는 곧바로 사단 영창에 보내졌고 최전방부대로 재배치되었다. 77년 만기 제대한 김민기가 취직한 곳은 부평의 한 봉제 공장이었다. 동료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 축가로 ‘상록수’를 작곡한 것도 그때였고, 78년 발표된 노래굿 ‘공장의 불빛’의 바탕이 된 것도 그때의 노동현장 경험이었다. 세간에는 ‘공장의 불빛’이 동일방직사건(파업 노조원에게 똥물을 투척)을 극화한 것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지만, 극 중에 묘사된 철야작업과 구사대, 노조탄압은 당시 어느 공장에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 노동현실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공장의 불빛’ 테이프를 배포할 때 김민기는 투옥될 각오를 하고 있었다. 78년 양희은의 음반에 ‘늙은 군인의 노래’나 ‘상록수’를 실을 때, 심의 통과를 위해 작곡가 이름으로 김아영이란 가명을 사용했던 그가 이번에는 카세트테이프에 보란 듯이 김민기 이름을 새겨 넣었다.


세월호 얘기 무지 하고 싶지만

같이 살든가 같이 죽든가 아니면

함부로 묘사할 수 없다고 생각

누군가 세월호 영화 주제가 요청

고등학교 때 만든 ‘친구’ 쓰라 해


20대 중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공장 노동자로, 건설현장 노가다로

탄광 광부로, 농사꾼으로 살았다

세상 낮은 곳에 몸을 수그린 채

그는 무엇을 찾아 헤맸던 것일까

김민기 극단 학전 대표.png






김민기 극단 학전 대표


노래 ‘친구’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그런데 조사만 받고 구속이 안 되었다.

“어차피 완전 포획돼 있는데 차라리 날 좀 구속해줬으면 좋겠더라구. 근데 나도 나중에 안 거지만, ‘저 새끼 잡아 놓으면 영웅 된다’고, 그래 가지고 안 잡아넣고 고사(枯死)시킬 작정을 한 거야. ‘좋다. 니들이 나를 밑바닥이라 하니 그럼 난 내가 좋아하는 밑바닥으로 들어갈게’ 그렇게 맘먹고 전라도에서부터 (농사일을) 시작한 거지.”


김민기는 고향인 익산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농사일을 배우다가 김제를 거쳐 경기도 전곡의 민통선 안에서 소작농으로 5천평 쌀농사를 지었다. 마을의 청년들과 합세해서 거기서 생산된 쌀을 도농직거래로 팔아 마을기금으로 쓰기도 했다. 시인 황명걸은 당시 김민기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우리의 친구, 쌀장수 김민기/ 영롱한 아침이슬 잔뜩 구두에 묻히고서/ 그가 오고 있다…”(‘쌀장수 김민기’ 중에서 1984)


-10·26이 나고 유신정권이 몰락한 뒤에도 계속 농사만 지었다. ‘이제 좀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해지겠구나’ 다시 음악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던가?

“(고개를 절레절레) 아예 농촌 내려갈 때 노래를 잊어버리려고 했지. 아침에 무슨 노래 하나 생각나서 하루 종일 따라붙으면 짜증나잖아. 그런 게 난 얼마나 많았겠어? 기타를 치는 사람, 현악기를 다루는 사람들은 자기 손가락 끝이 무지하게 귀해. 그런데 농사를 딱 시작하는 순간 이게 다 망가지는 거지. 그렇게 지워 버리려고 하다 보니까 지워지더라고 노래에 대한 기억이.”


-김제에서 농사지을 때 5·18이 일어났다. 들불야학이나 광주의 문화운동패하고도 평소에 교분이 있었다고 하던데, 광주항쟁에 대한 노래나 공연물을 만든 건 없다.

“없지.”


-안 하신 건가, 못 하신 건가?

“두가지 다…. 왜냐면, 사람들이 죽었거든. 죽음을 가지고 내가 함부로 묘사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이번에 세월호 아이들에 대해서 노래를 못 만드시는 것도 같은 이유인가?

“같이 살든가 같이 죽든가, 그러지 않곤 그 죽음을 묘사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그 죽음을 더 기억하게 할 수는 있지 않은가?

“죽음이 얼마나 끔찍한데…. 당사자만큼 절실하지 않으면, 그걸 묘사할 자격이 없다고 난 생각해.”


-자꾸 세월호 얘기를 물어서 죄송한데….

“세월호 얘기, 난 무지하게 많이 하고 싶어.”


-세월호가 우리 밑바닥을 다 드러낸 사건이었지 않나? 모든 걸 돈으로 환산하고 효용으로 환산한 우리의 밑바닥. 이런 셈법으론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데.

“똑같은 생각이다. 세월호 이후에 어떤 영화감독들이 영화를 만들겠다고 나보고 주제가를 만들어 달라고 했어. ‘야! 나 박정희가 시켜도 나 그런 거 안 했어. 왜 니들이 날 시켜?’ 그래놓고는 안쓰러워서 내가 고등학교 때 만든 ‘친구’라는 노래가 있으니 그걸 쓰라고 했지.”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 그 깊은 바닷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하는 그 노래!

“거기가 북평이었는데 지금은 동해시인가? 그때 난 고3이었는데 학교에서 보이스카우트 단원들이랑 야영을 갔다가 후배 하나가 죽었어. 그 사실을 후배 부모한테 알리려고 서울로 오는 기차 안에서 느낀 걸 노래로 만든 거야.

누가 그렇게 썼더라고. 1절하고 2절 가사가 뉘앙스가 너무 다르다고. 1절의 가사는 ‘검푸른 바닷가에…’ 어쩌고 서정적으로 가다가 2절은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 어느 누구 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 누가 있겠소” 이렇게 나간다고.

그 1절하고 2절의 간극이 뭐였냐면… 그 집행부 새끼들! 다 어른들이지.

너무 억울했어. 내가 만약에 후배 집으로 연락하러 오지 않았다면 난 그 어른들하고 붙들고 싸웠을 거야. 그 당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때 (강재훈 사진기자를 가리키며) 저 양반처럼 이렇게 찍은 거야. 그걸 제품이라고 만든 게 아냐. 차고 넘쳐서 흘러나오는 흔적이 그림이 되고 노래가 된 거지.”


-다른 사람들 회고에 따르면, ‘김민기는 앉은 자리에서 뚝딱 명곡 한 곡을 써내는 천재’라고 하던데.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는 원주로 공연 가는 버스 안에서 지었고, 술자리에서, 결혼 축가로 즉석에서 곡을 뽑아내는….

“아니 그럴 수가 없어. 주변에서 자꾸 그렇게 구술을 하는 거지. 실제 작업하는 과정이라는 건 그렇지가 않다고. 원래 그런 게 속에 있었으니까 긴 시간 숙성이 되가지고 나오는 거지, 라면 300원에 사듯이 그렇게 되는 게 창작이 아니잖아.”


허문도의 백지수표 “풀 뽑으러 간다”며 거절


그는 노래가 군중을 각성시키거나 일깨우는 도구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노래로 군중을 기만하는 건 더 큰 죄라고 여겼다. 광주학살로 집권한 5공화국 신군부는 1981년 ‘국풍81’이란 대형 문화축제를 기획했다. 훗날 공개된 정부 기밀문서에는 “학원문제를 국풍으로 유도해 축제 속에 매몰시킨다”는 국풍81의 목적이 전두환, 허문도의 친필서명과 함께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당시 허문도는 김지하, 김민기, 채희완, 임진택 등을 참여시키기 위해 각별히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문도를 직접 만나셨나?

“김제에서 농사지을 땐데, 허문도가 온 건 아니고 누굴 보냈더라고. 서울대 출신. 내려와 가지고 국풍 얘길 하길래, ‘나 농사지어야 해서 못 간다’고 했지. 그랬더니 백지명함 같은 걸 내 앞에 내미는 거야. ‘돈 쓰고 싶으면 맘대로 쓰라’면서.”


-아, 그 말로만 듣던 백지수표?

“풀 뽑으러 가야 돼서 싫다고 했지.”


그에게 “왜 받지 않았냐?”고 묻지 않았다. 그런 질문은,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 유혹을 물리친 사람한테나 적절한 질문이다. 김민기에겐 애당초 받을 이유가 없었을 뿐, 받지 않을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80년대는 많은 문화예술인, 지식인들이 전두환 독재에 대항해서 시국선언이나 서명운동을 맹렬히 벌이던 때다. 70년대 당신과 함께하던 민중문화운동 그룹들이 그 핵심에 있었는데, 당신은 한 번도 그런 활동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난 민예총에도 가입 안 했어.”


-왜 안 하셨나?

“그분들을 존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현실 참여의 문법이 다른 거지. 살아가는 방법이 다른 거야. 누군가는 그러지. ‘넌 사람들이 말하는 스타의 자질도 있는데 왜 안 하냐? 너 잘난 척하는 거냐?’ 근데 그런 게 아니라니깐. 나는 한없이 힘들게 내 일을 하고 있는데. (목소리를 높이며) 당신들이 아티스트를 인정해준다면, 샤갈의 그림 한 폭에 모든 우주의 얘기가 다 들어 있는 거야. 그 그림에 정치건 뭐건 다 있다고. 근데 왜! 난… 억울한 거지. 아이쿠, 내 목소리가 이상해졌네. 허허.”


김민기는 이 대목에서 격분을 이기지 못했다. 그에게도 80년대는 쓰라린 기억인 듯했다.


-1984년에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을 제작 발매해서 노래운동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셨다. 그런데 그 후 노래운동 그룹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크게 관여하지 않았던 걸로 안다.

“노래라는 게 ‘말’(言)하고 ‘음’(音)하고의 조합인데, 그 조합관계에서 난 아직도 해결 못한 숙제가 많다고. 근데 어떤 애들은 그걸 뛰어넘어서 다 해결한 것처럼 군다 말이야. 한자말이거나 관제화된 말을 막 쓰면서 거기다 음악을 갖다 붙이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런 의미에서 김민기 음악은 70년대 통기타 음악하고도 다르고, 80년대 노래운동 계열하고도 다른, 단독 카테고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말씀하실 건 아니고… 난 미술을 한 사람인데, ‘사각형’이라는 건 그렇게 오래가지를 못한다고. 임시적인 방편이야. 인간이나 자연 어디를 보더라도 직선이라는 건 없어. 어느 시점에서 이렇게 사각형까지 해보자, 이런 거지. 사각형이 자기주장이 되었을 땐 억지가 되기 쉽다고. 에잇… 이제 (인터뷰어의) 고문 취조가 막바지까지 가네.(웃음)”

극단 학전 사무실 한편의 풍경. 김민기 대표가 사용하는 책상과 책상 밑에 이동식으로 마련된 침대가 놓여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하 2㎞ 막장에서 만난 것

사람들 뇌리 속에 김민기는 저항가요의 전설이었지만 그는 사실 투쟁가를 목청 높이 외쳐 부르게 하는 전사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스크럼을 짜고 최루탄을 마시며 그의 노래를 목이 터지게 부를 때나 탁자가 부서져라 군창을 할 때에도, 그는 민통선 안의 폐가를 수리해서 땅을 일구고 묵묵히 농사를 지었다. 겨울에는 일거리가 없어서 충청도 탄광에 가서 광부 일을 하거나 목포 앞 김 양식장에 가서 일당 잡부를 하기도 했다. 세상 가장 낮은 곳에 몸을 수그린 채, 그는 무엇을 찾아 헤맸던 것일까?

-농사를 짓던 때가 제일 행복했던 때라고 회고한 글을 읽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농사도 그렇고 탄광도 그렇고 모든 게 배움이었으니까. 그때 내가 하나 깨달은 게 있는데, 내 식으로 속담을 만들었어. ‘사람은 웬만해선 안 죽는다’고. 내가 지하 2킬로미터 탄광에 들어가서 뭘 봤는지 알아?”

-뭘 보셨나?

“지상에 있는 사람들은 감을 못 잡을 거야. 지하 2킬로라는 막장이 어떤 의미인지. 거기에 연탄가루 같은 게 기다리고 있질 않아. 어마어마한 바윗덩어리들만 있을 뿐이야. 광부들이 삽을 들고 퍼내는 식으로 묘사하는 그림이나 영화는 다 가짜라구. 까만 1톤 탄차가 기다리고 있으면, 거기서부터 (머리 위를 가리키며) 대각선 위로 뚫고 올라가는 거야. 그걸 폭파시켜서 탄차에 쏟아 넣는다고. 들어가지고 옮길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아, 그런 줄 몰랐다.

“긴 다이너마이트 줄에다가 불을 붙여놓고 이~만큼 떨어져 나와서 담배를 피우지. 불빛이라곤 깐데라(칸테라: 광부 안전모에 달린 휴대용 전등) 불빛밖에는 없어.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멀리서 ‘음~’ 하는 소리가 나고 서서히 시야가 어두워져서 10센티까지밖에 안 보여.”


-폭발하는데 깜깜해진다고?

“이렇게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다고. 상상이 안 되는 거지. 뭐가 보인다는 건, 피사체가 있고 발광체가 있어야 할 것 아냐. 근데 먼지가 쫙 몰려오면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지. 근데, 어느 날, (코앞을 가리키며) 먼지가 서서히 걷히는데 딱 여기에 나비가 딱 나타난 거야. 어마어마하게 큰 나비가.”


-지하 2킬로 깊이의 갱도에? 환상이 아니고?

“가만히 보니 그게 나비가 아니라 모기야. 나비만큼 엄청 큰 모기. 광부들이 ‘동바리’(갱도가 무너지지 않게 괴는 나무기둥)를 하나씩 메고 들어가는데, 그 목재에 알로 묻어 들어온 놈이 거기서 부화를 한 거지. 빛을 못 봤으니까 이놈이 길어진 거고. 내 눈에 나비처럼 보일 만큼. 그때 코앞의 그놈한테 내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뭐라고 하셨나?

“너, 더 살 수 있을래?”


지하 막장 깊은 곳 어둠에서 만난 모기 한 마리에게 건넨 반가운 인사. “너 더 살아주겠니?”라는 그의 말은,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선 김민기 자신과 막장 인생들에게 건네는 뜨거운 격려와 감사의 말이 아니었을까. 너, 더, 살 수, 있을래?


“나 더 얘기해도 돼?”


가만히 생각에만 잠겨 있는 나에게 그가 말을 건넸다.


-물론….


“더 이상 갈 데가 없어가지고 원양어선을 타려고 했는데 내 신분 때문에 안 된다는 거야. 내가 무슨 북한 간첩이라고, 나쁜 자식들! 그래서 간 데가 목포에서 배로 네 시간 떨어진 하의도인데 김 양식장에 가서 품팔이를 했어. 김은 한겨울에 만월이 되었을 때 배가 떠야 뜯을 수 있지. 난 농사지으면서도 달력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 못했는데, 바닷물이라는 게 그렇더라구. 잔잔한 겨울 바다에 대보름달이 떠 있고 거기 배를 타고 들어가. 처음엔 무서웠지. 손이 들어가면 너무 차가울까봐. 근데 딱 들어가니까 물이 따뜻한 거야. 쿨렁쿨렁하는 배 위에서 빨랫줄같이 걸린 것들을 (아래를 보며) 이렇게 건져내야 해. 근데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 얘길….”

-보는 각도에 대한 얘기?


“맞다, 그 얘기! 미술이건 예술이건 중요한 건 ‘시각의 변화’야. 수평으로만 보는 게 아니고 대각선 위를 앙각으로 보기도 하고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하고. 내가 아동극에 자꾸 매달리는 것도 같은 이유야. 세상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보면 어떨까.”


선문답 같은 그의 얘기는 탄광의 모기에서, 겨울 바다의 김 따기, 아이들의 눈으로 보는 세상에 대한 얘기로 이어졌다. 김민기에게는 소년의 순수와 노년의 달관이 공존한다. 20대의 그는 지혜로운 노인처럼 부드러웠고 60대의 그는 수줍은 소년처럼 정직하다. 변한 것은 김민기가 아니라 그와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편협하게 굳어져 간 시선의 각도이다.


“난 내 노래를 듣기 싫은 게

오래 입다 벗어놓은 내복 같아요

다시 ‘쟁이’ 얘길 하자면

쟁이는 어제의 작업 부정해야 해

안 그럼 새로운 걸 할 수가 없어”

“‘쉼표’가 아니라 ‘숨표’야

전체를 살리기 위한 숨표!

1/16은 15/16랑 등가라고

복지가 그냥 퍼주는 게 아니야

아, 근데 말이 길다, 취했네”


무명 무실 무감한 인생, 지녀볼래


세월이 흘렀다. 김민기의 ‘상록수’는 아이엠에프(IMF) 공익광고에서 박세리의 우승 장면을 빛내주는 배경음악이 되었고, ‘늙은 군인의 노래’는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하던 방송 장면에 깔렸으며, ‘내 나라 내 겨레’는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불렸다. 2002년 노무현 후보는 직접 기타를 치며 ‘상록수’를 불렀고, 같은 노래가 2009년 시청 앞 노제에서 양희은의 노래로 그의 영전에 헌사 되었다.


김민기와 함께했던 통기타 가수들은 중간중간 제2의 전성기를 누리면서 쎄시봉의 추억담을 전해 줬고, 그와 함께 문화운동을 했던 이들 중 다수는 정계에서 대학에서 각종 문화예술단체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이름을 알렸다. 하의도 밤바다의 밀물과 썰물처럼 세상이 들고 남을 거듭하는 중에도 김민기는 그저 울렁이는 쪽배에 올라 보름달을 기다리는 어부처럼 한결같았다. 그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인생의 굽이굽이 데고 찔린 자국이 흠집으로 남아서 오래된 고향집 흙집처럼 파이고 쓸렸다. 그래도 한참을 잊고 달리다 돌아본 자리, 거기 그대로 한 사람이 서 있다는 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그와의 긴 대화를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다.


-살면서 주변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던 적은 없나?

“그런 거 없어. 날 고문한 놈들한테 내가 미안하다 생각 들었던 것, 그게 분기점이었던 것 같애. 뭐, 함께하자고 했던 친구들이 하나둘 대학으로, 정계로 떠나갈 때는 좀 선선하긴 했지. 나 혼자 남겨놓고 월급 받으러 가는구나 싶어서….(웃음)”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뭔가?

“요즘은 안 보고 산 지 좀 되었지만 4년 전인가 (김)지하 형이 박경리씨 <토지>를 뮤지컬로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온 적이 있어. 그런데 이 소설은 희곡이 아니기 때문에 대사가 적단 말이야. 상황 묘사가 대부분인데 그걸 다른 장르로 넘기는 순간 그 작가의 필력은 다 사라져 버리는 거야. 그래서 생각한 것이 ‘오디오북’인데, 원작을 가장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다른 장르로 옮길 수 있는 방법이지.”


-그 뒤로 진척이 없나?

“더 진행하지 못했는데. 이거 할 수 있는 데가 학전밖에는 없거든. 토지에 등장하는 인물이 600명이 넘는데. 비록 학전이 남의 집에 세 들어 언제 쫓겨날지 알 수 없는 신세지만 그동안 돈 안 되는 거 알면서 같이 일해 왔던 친구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최상일이라고 십년 넘게 노동요를 채집해온 사람이 있는데, 그 노래들을 거기 집어넣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지. 그렇게 박경리의 <토지>, 그리고 거기에 홍명희의 <임꺽정>까지 같은 방식으로….”


-그런 대작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할 텐데.

“학전 초기에 더러 친구들이 굉장히 진화된 방법인 양 ‘주식회사를 왜 안 만드냐?’고 그러던데, 주식회사를 만들면 주주들한테 배당이 가게 작품을 만들어야 하니까 그렇게는 하고 싶지가 않아. 다른 방법은 후원회를 활성화시키는 건데 그걸 마구잡이로 하면… 좀 자존심 상하지. 회원 가입하면 얼마 디시해 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모으면.”


-이건 어떤가? ‘돈 안 되는 일을 아무 조건 없이 후원해 줄, 철없는 사람들’ 구함!

“그거야 뭐….(웃음)”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 가운데 하나 바꾸고 싶은 게 있어. ‘쉼표’라는 말인데, 보통 제일 익숙한 게 4분의 4박자 네 마디의 악보인데, 대부분 그 넷째 마디 끝에 4분 쉼표가 하나 있지. 근데 이게 쉼표가 아니라 ‘숨표’라고. 내가 수영을 좋아하는데 수영하다 잠깐 올라오는 시간에 숨을 쉬는 거야. 마지막 16분의 1은 그 이전의 16분의 15를 내뱉기 위해서 들이쉬는 거거든. 쉬는 게 아니고 전체를 살리기 위한 숨표! 그러니까 16분의 1은 16분의 15랑 등가라고. 마이너리티(소수자)라고 보는데 마이너리티가 아니고. 복지가 그냥 퍼주는 게 아니란 얘기. 아, 근데 말이 길다. 내가 취했네.(웃음)”


김민기와 헤어져 돌아오는 대학로 골목에 바람이 불어 전단지가 날렸다. 지난 몇 주 내내 그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던 노래가 다시 입가에 맴돌았다. 한대수가 지은 곡을 그가 불러 1집에 넣은 노래.


끝 끝없는 바람/ 저 험한 산 위로 나뭇잎 사이 불어가는/ 아 자유의 바람/ 저 언덕 너머 물결같이 춤추던 님/ 무명 무실 무감한 님/ 나도 님과 같은 인생을/ 지녀볼래 지녀볼래(김민기 노래 ‘바람과 나’ 1971)

녹취 함규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붉은 잉크로 쓰인 신화, 김민기와 '아침이슬'[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6월항쟁 20년 축제의 시민합창곡 '아침이슬'에 대하여

07.03.21 14:02l최종 업데이트 07.07.06 20:26 l

강헌(news)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99169


김민기 작사ㆍ작곡의 '아침이슬'! 이 노래가 '역사적'이라고 한다면 그 역사에는 반드시 증언자들이 있을 터. 지난 30여 년의 세월 동안 이 노래를 속 깊이 불러온 모든 사람들이 증언자이겠으나 특별히 다음의 증언만으로도 이 노래의 역사성은 선명하게 입증된다.


장엄한 레퀴엠, 저항의 절정, 새로운 들음의 환경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장석주는 이렇게 기억한다. "'아침이슬'은 1975년 당국에 의해 금지곡이 되었다. 다른 금지곡들은 분명한 금지사유가 명시되었지만 이 노래에는 아무런 금지사유가 명시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다. 금지될 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금지된 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70·80년대에 이 노래만큼 널리 불려지고 사랑받은 노래도 없다. 수많은 군중의 목소리로 울려퍼지는 '아침이슬'은 무서운 감동과 전율을 동반하는 장엄한 레퀴엠 같았다."


김민기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시인 김지하는 이렇게 증언한다. "그의 노랫말에는 죽음이 배어 있다. 그러나 그의 음악을 들으면 부활의 기쁨이 느껴진다. 밑을 흐르는 세계와 삶에 대한 짙은 사랑과 잃어버린 유년의 고향으로 이끌어주는 듯한 강렬한 종교성은 죽음과 고문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그 자체로서 하나의 저항이었고 대안이었다. 그 절정이 '아침이슬'이다."


작곡가 이건용의 증언은 김민기와 '아침이슬'의 문화적 지평을 알려준다. "그는 우리나라의 노래 상황을, 그리고 그 상황이 갖고 있는 문제를 인식하였다. 그리고 이를 거부하고 새로운 들음의 환경을 만들기 위하여 스스로 노래를 만들었다. 그의 노래가 전파됨에 의하여 그의 환경에 동참하는 소집단이 생겼고, 이는 대중문화를 움직이는 힘과 대립되었다."


'아침이슬'에 관한 발언은 아니지만, 오늘의 김민기가 집중하고 있는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원작자 폴커 루드비히는 이렇게 증언한다. "자신과 비슷한 영혼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드물고 대단한 체험이다. 나는 김민기와 같은 천재가 내 영혼을 받아준 데 대해 너무 행복하고 고맙기 그지없다. 그를 벗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일은 더더욱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루드비히의 말처럼, 이제 우리 모두가 김민기를 벗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까. 지난 현대사의 굽이굽이에서 불렸던 '아침이슬'이 6월항쟁 20년 축제의 시민적 합창곡으로 울려 퍼질 것을 상상해보니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해 우리 모두가 능동태로 대답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한다.


박정희 시대, 혁명적 낭만주의의 가장 드라마틱한 독립전쟁


돌이켜보건대 60년대 박정희의 시대에 이르러 한국 대중음악은 트로트와 스탠더드 팝이라는 주류의 지형도를 확정한다. 이미자와 패티김으로 요약되는 이 두 사단 진영에 긴장을 불어넣은 것은 록과 리듬앤부르스, 사이키델릭으로 무장한 신중현 사단이었다. 그러나 70년대가 개막하면서 거대한 폭풍이 대학가에 불어왔고 그 깃발은 통기타에 바탕을 둔 모던포크였다.


김민기와 양희은. 그리고 '아침이슬'은 이 혁명적 낭만주의의 가장 드라마틱한 독립전쟁이었다. 김민기의 영웅적 비극성을 담지한 텍스트와 단정무비한 통기타 연주는 대중음악이 역사에 개입할 수 있음을 열어놓았고, 양희은의 당당하고 또렷한 발상은 애상의 무의식을 일거에 전복시켰다.


예술에 대한 허위의식과 대중에 대한 아부를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린 듯한 어린 대학생의 생목소리는 바로 혁명적 낭만주의로 불타오른 당시 신세대들의 표상으로 추인되었다.


양희은의 가장 위대한 공헌은 그가 한국의 대중음악사에 걸쳐 여성 보컬리스트에 부여되었던 저열하기 그지없는 선입견을 여지없이 분쇄해버린 데 있다. 양희은의 당당하고 또렷한 발성은 대중음악에 있어서 가사의 의미 전달을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범벅된 한국대중음악의 과잉된 습기를 단숨에 제거시켰다. 부탁하건대, 다시 한번 그 무렵의 '아침이슬', 다름 아닌 양희은의 '아침이슬'을 들어보라.


김민기, 전쟁의 유복자로 태어난 그가 1966년 고등학교 입학 선물로 받은 기타를 손에 잡았을 때,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삼선개헌안을 밀어붙이던 1969년 서울대 미대에 입학한 그가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라는 뜻)라는 이름의 듀오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을 때, 나아가 '오적' 필화 사건과 평화시장의 노동자 전태일이 죽음으로 진실을 알리던 1970년의 어느 날 양희은을 만나 그의 음악적 동반자가 되었을 때, 그리하여 이듬해 마침내 그 자신의 데뷔 앨범을 발표하고 72년 봄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 초대되어 노래 부르기를 지도하다 이튿날 새벽 동대문 경찰서로 연행되고 시중의 그의 음반이 전량 압수되었을 때, 이 모든 순간은 1926년 윤심덕의 '사의 찬미'와 더불어 열린 한국의 대중음악사가 건강하고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한 젊은 '도깨비'와 대면하는 자리가 되었다.


김민기와 '아침이슬'의 등장은 애상의 정조로 일관하던 우리 대중음악사의 흐름을 단숨에 바꾸어 놓았고, 유신을 치밀하게 획책하던 제3공화국 정권은 그를 요시찰 인물로 묶음으로써 그와 그의 노래를 영원한 신화로 만들었다.


대중음악의 정치적 무관심주의에 대한 반격


이 역사적인 앨범을 관통하는 하나의 정신은 노래에 대한 반성적 사유이다. 그의 노래들이 해방 직후의 조선음악가동맹 작곡가들의 노력처럼 명백한 정치적 슬로건과 민족음악 언어의 수립이라는 대의적 명분을 표방한 것은 아니었지만 트로트와 전쟁 이후 범람하기 시작한 미국의 대중음악에 대한, 그리고 우리 대중음악의 정치적 사회적 무관심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반격의 예광탄이 되었다.


이 반박의 대상에는 트윈 폴리오로 대표되는, 60년대 후반부터 대학가에 일기 시작한 통기타 현상과 양병집ㆍ서유석 등 밥 딜런 류의 비판적 대중음악을 일차적으로 본뜨던 사조까지 포함된다. 이 앨범과 그가 음악적 내용을 제공한 같은 해의 양희은의 데뷔 앨범이 있음으로써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와 남진의 '님과 함께'로 그어지던 한국 대중음악계는 또 하나의 문제의식을 포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앨범은 두 곡('바람과 나'와 '저 부는 바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의 작품이다. 그는 또한 록 음악의 신중현과 함께 본격적인 대중음악가, 곧 자작곡 가수(싱어송라이터)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이 앨범이 발표된 지 16년 뒤인 1987년 민주항쟁 직후에 이 앨범은 비로소 복권되었고 곧 복원반이 나왔다.


김민기의 노래는, 특히 '아침이슬'은 입에서 입으로, 투박한 등사기법으로 복제된 가사 모음들을 통해 요원의 불길처럼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지나갔다. 그것의 원동력은 탄압이 분만한 단순한 반작용 때문이 아니라 그의 노래 자체가 품고 있는 젊은 한국어와 그것의 음악적 울림 때문이다.


그리고 저 1987년 6월 10일, 한국 젊은이들의 이성을 하나로 묶어주고 모든 시민의 정치적 열망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 구호는 '호헌철폐 독재타도'였지만 그 모든 사람들의 뜨거운 심장을 고동치게 한 것은 '애국가'와 '아침이슬'이었다. '애국가'의 장엄함과 '아침이슬'의 영웅적인 비극성은 일체감이라는 강력한 주술을 수행하며 한국 현대사의 새 장을 기술하는 붉은 잉크가 되었다.


세시봉 뜨니 저도 많이 부르네요 … 신입생 환영회 때 딱 한번 가봤는데 …[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중앙일보] 입력 2011.02.22 00:09 / 수정 2011.02.22 00:49


20돌 맞는 대학로 학전소극장 대표 김민기

서태지 돌풍에 통기타 죽을 때

갈 곳 없는 가수 불러 콘서트

대표적 가수가 김광석이죠


지난 20년 대학로를 지켜온 김민기 대표는 “옛날엔 극단들이 연극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기획사들이 돈 놓고 돈 먹기로 접근한다. 그런 맥락에선 문화랄 것이 형성되기 어렵다”고 했다. 그래도 “극장 문 닫을 때까지 공연을 하겠다”고 다졌다. [연합뉴스]

‘문화 인큐베이터’란 수식어가 따라붙는 서울 대학로 학전소극장(현 학전블루 소극장)이 다음 달 15일 20돌을 맞는다. 학전은 ‘김광석 콘서트’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등 소극장 콘서트를 이끌었고, 15년간 공연한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으로 한국 공연예술사를 새로 썼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 관련 자료는 오는 9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특별 전시되고, 근·현대 서울유산으로도 등록된다.


학전은 배우의 인큐베이터이기도 했다. 20년간 학전에 오른 공연 중 70%가량이 기획공연이었다. 그 중심엔 김민기(60) 대표가 있다. 21일 대학로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별것도 아닌 일에 와주셔서 감사하다”며 말문을 열었다.


-20주년 공연 소개를 해달라.


 “학전 레퍼토리 공연 ‘지하철 1호선에서 고추장 떡볶이까지’가 다음 달 10~20일 열리고, 뒤이어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5-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가 22~30일 진행된다. 레퍼토리 공연은 2시간 40분짜리 ‘지하철 1호선’을 80분짜리 다이제스트판으로 보여주고, 2부에선 나머지 학전들의 레퍼토리를 소개한다.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5’에는 요새 한창 뜨는 세시봉의 이장희와 조영남 형이 참여하겠다고 한다. 학전 문 열던 1991년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오면서 통기타 음악이나 일반 가요가 완전히 죽던 해였다. 그때 갈 데 없는 가수들을 불러 소극장 콘서트를 시작했다. 대표적인 게 김광석이다. 학전의 두 축이었던 뮤지컬과 콘서트를 보여주는 거다.”


-요즘 세시봉이 인기다.

 “나는 출연을 안 했는데도 여러 군데서 인사를 받았다. 1971년 판(‘아침이슬’)을 내자마자 전량 압수되면서 가수로서 아무런 활동을 할 수 없었다. 세시봉에는 딱 한 번 가봤다. 대학 입학 신입생 환영회를 거기서 했다.”


-젊은층에게 옛날 음악 들려주는 공연은 안 만드나.

 “복고풍 가요프로를 어쩌다 보면 옛날에 가수 생활 하셨던 분들이 노래를 전혀 못 하는데 괜히 나와서 옛날 기분으로만 하더라. 노래 되게 못하더라…. 세시봉 그 양반들만큼 꾸준히 해온 사람들이 없다. 복고풍 프로그램은 그게 한계일 거다.”


-요즘엔 댄스에 아이돌이 대세인데.

 “대중음악의 취향이란 것이 아무리 댄스·아이돌로 가다가도 질리지 않나. 아날로그적 음악의 본령에 대한 욕구를 세시봉 콘서트가 대변한 것 같다. 대학로의 소극장 콘서트는 2000년대에 소강 상태였다. 이제 아날로그적 감성을 갖고 있는 젊은 음악인을 슬슬 소개해야 할 듯싶다.”


-눈에 띄는 뮤지션이 있나.

 “(학전이 기획했던) 김광석 추모 콘서트에 참여한 젊은 음악인이 그런 맥락에 있다. 이적, 지난해 학전에서 콘서트를 했던 루시드 폴, 몇 해 전부터 학전 어린이 무대 음악 감독을 맡고 있는 정재일 등이다.”


-경영 상태는 어떤가.

 “말도 아니다. 소극장이란 게 꽉꽉 차도 현상 유지다. 요즘 만들고 있는 어린이 공연은 작품당 4000만~5000만원씩 적자가 난다. ‘지하철 1호선’으로 모아뒀던 게 바닥났다. 20주년 기념 공연의 수익금은 어린이 무대 기금으로 조성할 생각이다. 지난해엔 국민은행에서 후원을 받아 학교에 찾아가서 공연을 했었다. 조명도 없고 무대는 형편없지만, 아이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그런 걸 본 적이 없고, 자기들의 이야기니까.”


-어린이 공연에 매달리는 이유는.

 “지금까지 한국의 어린이를 위한 물건은 전부 유아용이었다. 학전이 건드리기 시작한 건 초등학생부터 청소년까지를 대상으로 한다. 종전의 아이들 물건은 유아용에 판타지였다. 현실에 없는 붕 뜬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주입시키는 것이다. 학전은 리얼리티를 먼저 확보해 아이들이 작품을 보며 자기 스스로를 인식하게 하겠다는 노선을 세웠다.”


-좀더 설명한다면.

 “한국의 아이들은 취학하고 나면 학교, 학원, 게임, TV에서 제공되는 것만 접한다. 공연은 아날로그다. 배우를 직접 만나고 다른 관객과도 함께 한다. 고립된 게 아니다. 그것이 우리나라 취학 아동과 청소년에게 가장 부족한 면 아닌가. 아이들은 어떤 의미에서 약자다. 우리나라 교육 환경이 말도 안 되게 사람 잡는 거라서, 돈이 안 되는 걸 알지만 붙들고 있어야겠다는 소박하지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20년을 끌고 온 원동력은.

“바보 같으니까. 미련하니까. 촌티를 못 벗어서….”


이경희 기자  (2011년 2월 22일 중앙일보)

[출처] 김민기 인터뷰 |작성자  na59000


아침이슬, 그 사람[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입력 2015.04.04. 09:30  댓글  83개

https://news.v.daum.net/v/20150404093010177


[한겨레] [토요판] 커버스토리 / 이진순의 열림, 김민기 (상)


이진순이 만난 학전 대표 김민기

속마음 털어놓은 최초의 인터뷰


1970~80년대 청년 문화의 원형을 만든 인물이자 노래와 연극, 문학을 아우르며 한국 문화의 새 지평을 연 르네상스적 인간. 나이 만 스물에 지은 ‘아침이슬’이 평생 꼬리표가 된 사내.

김민기 극단 학전 대표를 수식하는 말은 그가 지나온 험한 세월만큼이나 많다.

1991년 개관한 소극장 학전은 황정민, 조승우, 설경구, 방은진 같은 이를 배출한 한국 문화계의 산실이자 가수 김광석이 숨지기 전 1000회 공연을 한 곳이다. 김 대표가 직접 연출한 <지하철1호선>은 2008년 종연 때까지 15년간 71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으며 4000회나 공연된 국내 최장수 뮤지컬이 됐다. 지난 10여년간 고집스레 청소년극과 아동극에 공을 들이고 있는 김 대표는 공연 홍보 등을 제외하곤 속내를 털어놓는 긴 인터뷰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한겨레> 토요판 인터뷰 코너 ‘이진순의 열림’의 초대에 응한 그는 네 차례에 걸쳐 무려 15시간 동안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가 인터뷰 내내 가장 강조한 말은 ‘돈 안 되는 일’이었다. 사진은 지난달 24일 첫 인터뷰 때의 모습이며, 다음주에는 제2회가 실린다.


“문 닫을 때까지 그 짓을 하는 거다, 돈 안 되는 일!”


후줄근한 점퍼 차림에, 고개를 푹 수그린 사내가 벌서러 교무실 끌려오는 소년처럼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을 하고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손에는 막걸리 세 통이 든 비닐봉지가 덜렁덜렁 들려 있었다.


“내가 맨정신으론 도저히 얘길 못할 것 같아서….”


겸연쩍은 표정을 하고 그가 씩 웃었다. 공연물의 홍보를 위해 기자들을 만난 적은 있지만 자신의 “옛날 얘기”를 듣겠다고 청해 오는 인터뷰는 번번이 사양을 해왔는데, 어쩌다 술김에 하겠다고 했는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며 그가 막걸리 한 잔을 따랐다. 20년 넘게 극단 학전을 이끌어온 대표이자, 15년 롱런의 경이적 기록을 세운 <지하철1호선>의 연출가. 그러나 그는 상업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거나 대중적으로 나서는 일을 여전히 병적으로 혐오하는 듯했다.


1970년대 청년문화의 원형질을 제공한 국내 최초의 싱어송라이터, 콘서트 한번 안 했는데 한국사의 주요 변곡점마다 그의 노래가 불린 사람, 공장 노동자로 농사꾼으로 막장 탄부로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그 스스로 ‘아침이슬’과 ‘상록수’가 되었던 사람, 미술에서 시작해서 노래와 연극과 문학을 아우르며 한국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사람. 김민기(64), 그는 동시대 그 누구보다도 밀도 높은 삶을 살아왔다.


‘아침이슬’이 담긴 데뷔앨범을 낸 게 그의 나이 만 스무 살 때이니, 이제 환갑을 훌쩍 넘긴 그가 지나온 삶의 아픔과 갈등, 회한과 소망을 담담히 들려줄 때도 되지 않았을까. 그 험한 시대를 가장 뜨겁게 겪어냈으면서도, 가시 돋친 공격성이라곤 없이 유순하고 담담하게 자기 자리를 지켜올 수 있었던 비결은 뭔지, 어떻게 이 남자는 괴물과 싸우면서도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얘기를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까. 나도 그가 건네는 막걸리 한 잔을 받았다.


음반 팔아 마련한 배우들의 못자리, 학전


그가 가장 덜 부담스러워할 질문, 학전에서 최근 준비 중인 인문학 강좌에 대한 얘기부터 꺼냈다.


-그리스신화에 대한 강좌가 곧 시작될 거라던데.

“학전 문예 강좌를 시작한 게 94년인데, 유홍준, 이태호, 윤용이 교수 같은 분들 모시고 한국학 관련된 걸 주로 하다가 이번에 11번째로 잡은 주제가 그리스신화다. 서양에서 인문학의 원조라면 그리스신화인데, 유재원 교수(한국외대 그리스학)가 내가 알기론 이 분야에서 어마어마한 보물이다. 3년 동안 총 30강 계획으로 학문적인 총정리를 해보려 한다.”


-인문학 강좌를 그렇게 오래 해왔는데 정작 당신은 왜 강의를 한번도 안 했나?

“난 ‘쟁이’지, 평론가나 정치가가 아니거든. 내가 추상화를 걸었는데 누가 와서 이게 뭘 의미하냐고 물으면 난 할 말이 없어. 작품을 말로 설명하는 사람이 있고, 나처럼 (그리는 시늉 하며) 직접 만드는 팔자가 있는 거니깐. 그걸 설명할 재주가 있었다면 그림을 안 그리지.”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제야 그와 눈이 제대로 마주쳤다. 내친김에 나도 조심스럽게 그에게 당부하고 싶은 얘기를 꺼냈다.


-그간 하신 인터뷰를 찾아 읽어봤는데 좀 아쉬운 점이 느껴졌다. 김민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형화된 선입관을 깨겠다는 마음에서 그랬을 테지만, 어떤 대답은 너무 무성의하고 위악적이다. 예를 들어, 옛날에 공장 가고 탄광 간 것 물어볼 때마다 ‘아무 뜻 없고, 그냥 먹고살려고 간 거다’라고 답한다든지, 정치적인 질문에 대해서 ‘난 그런 데 신경 쓸 여유도 없고 관심도 없다’고 말한다든지. 정말 그게 다인가? 대한민국 평균 시민도 그렇게 말하진 않을 거다.

“그렇다. 쭉 그렇게 답해왔다. 그동안은 내가 하는 작품에 대해서 얘기하자고 만났는데 사람들이 그건 들을 생각 안 하고 다른 얘기, ‘너 어떤 사람이야?’ 자꾸 이런 걸 물으니까… 난 그저 ‘몰라. 그거 얘기할 준비도 안 돼 있어’라고 말하려던 건데. 나중에 그게 인용이 되면 또 다르게 비치기도 하고… 나도 이번엔 에잇, ‘발가벗으라면 벗자’ 하는 심정으로 나왔다.”


-감사드린다.(웃음) 젊은 시절의 김민기를 우상화하는 사람들을 의식해서 지나치게 자신을 폄하하지도 마시고, 균형 잡힌 회고를 해주셨으면 한다. 오늘은 ‘그간 무엇을 하셨는가?’보다는 ‘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여쭙겠다.

“완전 보안사 취조실이네. ‘너 왜 그랬어?’ 하는….(웃음)”


-학전 얘기부터. 학전은 어떻게 오픈하게 된 건가? 돈도 별로 없으셨을 것 같은데.

“연우무대라는 극단이 있었다. 내 친구, 선후배들이 하는 극단이어서 내가 도울 게 있으면 돕고 그랬는데, 내 지인이던 지금의 건물주가 ‘연우무대가 온다면 소극장을 지어주겠다’ 한 거야. 난 연극인도 아니고 중간다리였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떠맡게 됐지. 근데 돈이 있나? 그래서 대형 음반사를 찾아갔다. 선불금을 5천만원 해줄 수 있냐고 하니까 당장 해주겠다고 그러데. 그래서 할 수 없이 떨이로 음반 넉 장을 낸 거지. 노래할 생각이 조금치도 없었는데.”


그때 나온 음반이 <김민기 전집>(1993)이다. 71년 그의 첫 음반이 압수된 이후 처음으로 정식 녹음한 음반이었다. 그 돈으로 91년 학전이 개관했다.


-학전은 유명 배우들을 배출해낸 연기사관학교로 불린다. 황정민, 조승우, 김윤석, 설경구, 방은진 같은 이들이 모두 학전 출신이니.

“학전(學田)이 한자로 배울 학에 밭 전 자다. 학전 처음 열 때 내가 한 말이 있다. 여기는 조그만 곳이기 때문에 논바닥 농사가 아니다, 못자리 농사다. 못자리 농사는 애들을 촘촘하게 키우지만 추수는 큰 바닥으로 가서 거두게 될 거라고.”


-그 말대로 되었다. 학전에서 자란 연기자들이 한국 문화계 주역이 되었으니.

“뭐 더러 잘되는 놈도 있지만 아직도 잘 풀리지 못해 자괴감에 빠져 있는 놈들이 90퍼센트가 넘으니 걔네들이 더 밟히지.”


-배우를 캐스팅할 때 뭘 제일 중요하게 보시나?

“학전 오픈할 때, 내가 연극이나 뮤지컬에 대해서 미리 배워놓은 게 없으니까 뭘 가르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내가 백지(白紙)니까 배우를 캐스팅할 때도 백지인 애들을 뽑은 것 같다. 이미 어디서 뭘 배워 온 사람들, 나쁘게 말하면 ‘쿠세’(굳어진 습관)랄까, ‘쪼’가 있는 사람들은 내가 컨트롤할 능력도 없고. 나처럼 백지 입장에서 같이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았다.”


“맨정신으론 도저히 얘길…”

막걸리 세 통 들고 나타난 그

자신 드러내길 병적으로 혐오해온

학전 대표, <지하철1호선> 연출가

그가 발가벗는 심정으로 나왔다

15년간 관객 71만명 끌며

매표수입 100억 넘긴 <지하철1호선>

4000회 끝으로 돌연 중단 선언

대신 10년째 청소년·아동극에 공

“세상엔 돈 안돼도 해야 할 일 많아”

김광석과 유재하를 먼저 보내고…


-학전 입구에 김광석 노래비가 있던데, 김광석에 대한 남다른 애틋함이 있는가 보다.

“학전에서 광석이가 1000회 공연을 했는데, 처음 만난 게 84년도던가? 광석이가 가수를 하고 싶다고 찾아왔는데 노래를 들어보니까 너무 못하는 거다. 그래서 ‘너 가수 하지 마라’ 그랬는데….”


-김광석이 노래를 못한다고?

“비틀스가 그렇게 유명하지만 비틀스도 노래는 잘 못하지. 테크니컬한 측면에서는.”


-(갸우뚱) 일단, 그렇다 치고….

“학전 오픈하고 몇 개월 만에 빚이 한없이 늘었다. 100퍼센트 대관이 된다고 해도 계속 적자…. 마침 그때가 대중문화의 판도가 바뀌는 시점이었다. 그해에 서태지가 나왔으니까. 통기타고 뭐고, 아날로그 음악 하던 놈들이 하루아침에 된서리를 맞았지. 어디 갈 데가 없는 거야. 어차피 극장 빚은 쌓여가고 그건 내가 지고 가는 거니까, ‘니들 와서 노래하고 싶음 해라!’ 그랬지. 그래서 광석이가 온 거다.”


김광석 콘서트가 예상 밖의 큰 호응을 거두면서 땡볕 아래 대로변까지 관객들이 줄을 섰다. 김광석은 “나는 벽에 붙어서 노래해도 좋으니” 최대한 많이 들이자고 고집해서 복도 문짝까지 떼어내고 관객을 받을 정도였다.


-노래를 못하는 애라고 하셨는데.(웃음)

“그래도 광석이의 미덕이 하나 있다. 젊은애들이 딴따라를 하게 되면 대개 싱어송라이터를 하고 싶어 한다.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 이거지. 근데 싱어송라이터들은 자기 곡만 줄기차게 부르려고 해. 광석이는 지가 만든 곡이 여럿 있지만 다른 좋은 노래를 계속 찾아다니면서 부른 거야. 그러기 쉽지 않은데 큰 미덕이지.”


‘이등병의 편지’(원곡 전인권)와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원곡 김목경)도 그렇게 리메이크된 곡들이다. 그러던 김광석이 96년 갑자기 세상을 떴다.


-그런 인연으로 김광석 추모사업회장을 맡으셨나?

“내 팔자에 어쩌다가 먼저 죽은 후배들 뒤치다꺼리를 하게 되었는지… 유재하도 비슷한 케이슨데, 걔는 교통사고로 죽었다. 재하가 죽기 일주일 전 날 찾아왔어. 내가 그때 그 녀석한테 준 선물이 있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나온 판소리 다섯마당 가운데 박봉술 선생의 흥보가였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박봉술 선생의 창법은 당시까지는 ‘썩은 목’이라고 불리던 건데, ‘한국말을 어떻게 하면 이렇게 텁텁하게 할 수 있는지’ 공부하라고 준 거지. 재하 창법이 판소리에서 말하는 ‘노랑목’이어서. 근데 아마 그 녀석, 안 들었을 거야.(피식 웃음) 재하 사십구재 공연도 내가 연출해서 했고, 작년부터 재하네 그룹이 학전에서 공연을 하기 시작했어. 어쩌다 보니 광석이, 재하 요 두 라인이 학전 팔자에 이상하게 끼어 들어와 있네.”


-김광석이나 유재하는 시장에서 말하는 소위 ‘블루칩’ 같은 존잰데, 그걸로 돈을 만들어서 ‘뭔가 더 의미있는 작품을 만드는 데 쓰겠다’ 이런 식으로 가는 게 경영자 마인드 아닌가?

“그렇게 나온 대형 뮤지컬도 몇 편 있다. <그날들>이라든가 <디셈버>…. 근데 난 그걸 못하겠다.”


-왜?

“인터뷰 못하는 거랑 똑같다. 그냥 체질에 안 맞는 것.”


-돈이 싫은가?

“아우, 돈이 얼마나 필요한데. 학전에 지금 빚이 몇 억인지. 요새 계산도 안 돼.”


-<김광석 다시 부르기> 콘서트도 관객이 몰리니까 학전에서 하던 걸 바깥의 대형극장으로 내보내고. 오는 돈도 마다하시는 판국이다.

“난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지, 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야.”


-정 그러면 대본이나 연출 이외의 업무들, 기획이나 제작 같은 비즈니스는 누구 다른 사람한테 맡길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하는 순간 그게 고용이 되거든. 그러면 그쪽에서도 돈의 논리 때문에 나한테 (상업성 있는) 작품 내용을 요구하게 된다고. 근데 나는 그 돈 벌겠다고 내용을 그렇게 바꾸고 싶지가 않은 거지.”


‘쟁이’가 뭐냐고? 병이지, 결벽증 같은…


91년 이래 적자 누적으로 폐관 위기에 놓였던 학전에 극적 회생의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94년 초연된 뮤지컬 <지하철1호선>이었다. 독일 그립스극단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지만, 김민기의 거듭된 수정 번안을 통해 완전히 한국의 뮤지컬로 재창조된 작품이다. <지하철1호선>은 당시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전부이던 한국 공연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원작자인 폴커 루트비히는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깊이로 재해석된 작품”이라고 칭송했다. 소극장 뮤지컬에서 라이브 연주를 도입한 것도, 원작자에게 저작권료를 제대로 지급하고 무대에 올린 것도, 출연진과의 ‘서면계약’이나 ‘러닝개런티’ 제도를 도입한 것도, 학전이 처음이었다. 전국순회공연과 해외공연까지 성황리에 마친 <지하철1호선>은 그러나 2008년 4천회 공연을 끝으로 돌연 중단을 선언했다.


-15년간 관객 71만명을 끌어들인 작품인데 왜 공연을 중단했나?

“그게 아마 매표수입이 100억원을 넘겼을 건데.”


-저런! 계속했으면 ‘창조경제’의 모범이 되었겠다.(웃음)

“중단한 이유? 돈만 벌다 보면 돈 안 되는 일을 못할 거 같아서.”


망치로 머리를 맞은 느낌이 이런 걸까. 더 뭐를 물어봐야 할지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면… 어, 저, 관객수가 줄어서 그런 게 아니고….

“아니고, 그냥 ‘끊은’ 거다. 장기공연으로 가다 보니까 배우들의 체력이나 감성을 고려해서 1년에 2팀이 돌아가며 했는데, 그러다 보니 사람이 완전히 부속품이 되더라고. 나 이러자고 세상 사는 거 아닌데, 내 나이도 낼모레 환갑이고 이 짓 하다가 죽을 거냐 싶더라. 그래서 딱 끊었다.”


-‘끊었다’고 표현하신다!

“어차피 난 돈 되는 거 할 줄 모르는 놈이니까, 내가 해야 할 일, 내 나이에 맞는 걸 해야지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직원들이 지금 고생하고 있지만. (옆에 있는 직원을 보며) 대번에 고개 끄덕거리는 것 좀 봐.(웃음)”


돈 되는 <지하철1호선> 대신, 자신이 할 일이라고 여기며 김민기가 10여년째 공을 들이는 건 청소년, 아동극이다. ‘학전 청소년무대’ 시리즈로 <굿모닝 학교> <복서와 소년>을, ‘학전 어린이무대’ 시리즈로 <우리는 친구다> <고추장 떡볶이> <슈퍼맨처럼> <무적의 삼총사> 등을 잇따라 선보였다. 어린이물은 방학 중에만 올리고 평상시엔 성인물을 올리는 게 연극계의 상례인데, 학기 중에도 어린이, 청소년극에 전력투구하고 있으니 공연을 할수록 적자만 느는 게 당연하다. 작년부터 어린이정가를 1만8000원에서 1만2000원으로 바꾸면서 상황은 더 나빠졌다. 소득수준이 낮은 가정의 아이들이 볼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자는 김민기의 고집을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어린이와 청소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언제부턴가?

“아주… 오래전부터. 71, 72년에 양희은이랑 판 낼 때도 애들 노래는 꼭 들어갔다. 그냥 왠지 애들에 대해서 늘 관심이 가더라고. 동학에서 최시형이 ‘애 때리지 말라’고 한 것도 자꾸 마음에 맴돌고. 쟁이라는 게 ‘어떻게 계산하면 돈이 될지’는 따지지 않으면서, 자기가 딱 꽂히면 거기서 피할 수가 없다. 그게 쟁이의 속성이다.”


-‘쟁이’의 정의가 뭔가?

“어이쿠, 뭐 그런 어려운 질문을… 병이지, 뭐 결벽증 같은.”


-그래도 계속 적자를 보면서 할 수는 없지 않나?

“(언성 높이며) 내 목표는 더 이상 빚낼 수 없어서 문 닫을 때까지 그 짓을 하는 거다. 돈 안 되는 일만 골라서 하는 거지. 이건 피할 수 없는 내 팔자야. 그래도 이런 것 정도는 우리한테 있어야 된다고! 논리를 떠나서! 낫살 먹은 놈이 해야 될 일을 하는 것뿐이지.”


따박따박 돈 얘기만 물고 늘어지는 데 그는 부아가 난 모양이었다. 최소 경상지출만 한달에 4천~5천만원인데 그는 어떻게든 빚을 내서 직원들 월급을 밀린 적은 없다고 했다. 아이엠에프(IMF) 때 딱 한번 빼고는. 작곡·작사가로서 그간 만든 노래의 저작권료가 재정적 도움이 되나 궁금해 물으니 “월 백만원대”란다. 100여곡에 달하는 노래를 만든 사람의 저작권료로는 믿어지지 않는 액수다. 그래서 이번에 저작권 신탁관리를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서 새로 생긴 ‘함께하는 음악저작인협회’로 옮긴다고 했지만, 돈의 액수 때문이라기보다는 투명성에 대한 불신 때문인 듯했다.


문둥이 아이를 받아내던 산파 어머니


김민기는 1951년 전쟁통에 전북 이리(현 익산)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인민군에 학살당해 돌아가시고 과부가 된 어머니가 유복자인 민기를 낳았다. 원산이 고향인 어머니는 숙명여고를 나오고 연희전문 1기로 입학한 인텔리 여성이었다. 연희전문 시절, 조선학생에 대한 차별에 항의하며 들고일어났다가 퇴학당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조산원(산파) 자격증을 따서 돌아와, 아이 받는 일을 하며 10남매를 키웠다.


-출생부터 파란만장하시다.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게 기적이지. 어머니는 늘 바쁘시고 형제들은 학교 가고 혼자 놀면서 컸는데, 어려서 제일 무서운 게 뭐였는지 알아? 아이고, 근데 내가 취했다. 자꾸 반말을….”


-편하게 말씀하셔도 된다.(웃음) 제일 무서운 게…?

“제일 무서운 게 문둥이하고 팔다리 잘린 상이군인들이었다. 근데 방학이면 서울에 있는 형, 누나들이 온다고 해서 역에 마중 나가는데, 역에서 그 무시무시한 문둥이들이 우릴 보고 막 다가오는 거야. 굉장히 무서웠다. 근데 그놈들이 어머니한테 인사를 굽실하고… 알고 보니 어머니가 일정 때부터 받아준 놈들이야. 어머니가 그 사람들한테 돈을 받았겠어? 내 말은 세상에 돈 되는 일만 다가 아니다 이거지. 그 전쟁통에 그 아이들 안 받으면 어떻게 할 거야? 돈이 안 돼도 사람이 해야 되는 일은 해야 된다. 내가 아동극을 하려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서울로 올라온 그는 서울 재동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학을 거쳐 66년 경기고에 입학한다. 경기중·고 시절 미술반 활동은 그의 “청소년기의 모든 것”이었다. “난 경기중·고를 다닌 게 아니라 경기중·고 미술반을 다녔다”고 말할 만큼.


-그림 그리는 게 그렇게 좋았나?

“경기고 미술반이 프라이드가 무지하게 셌는데, 그때 우리 모토가 ‘정물화는 안 그린다’였다. 미술실에서 앉아서 그리면 안 된다!”


-그럼 뭘 그리나?

“무조건 화판 들고 나가는 거지. 중학교 1학년 때 미술반 선배가 ‘어디서 사과나 꽃병을 그리고 자빠졌어? 나가!’ 해가지고 남대문 시장 좌판에 가서 그리던 기억이 난다. 그거 때문인지, 내가 만든 노래들은 내가 살면서 어딘가 (현장에) 따라가서 이렇게 그린 거야. (그리는 시늉) 단지 붓이 아니고….”


-음악으로 그렸다?

“노래로 그린 거지. <지하철1호선>도 사실은 풍속화야.”


김민기는 69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했지만 그에게 정형화된 미대 수업은 따분할 뿐이었다. 1학년 1학기에 낙제를 한 그는,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아르바이트 삼아 듀엣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듀엣의 이름은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 재동국민학교 1년 후배인 양희은을 만나게 된 것도 그 무렵이다.


-이전의 인터뷰 보니, ‘아침이슬’이나 ‘상록수’ 얘기만 나오면 굉장히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보이시던데 왜 그러나?

“그 노래들이 내 몸에서 나간 거긴 한데, 나간 것의 백배가 되어서 돌아오면 내 몸이 버거울 수밖에….”


-87년 시청앞 광장에서 이한열 노제가 벌어질 때 어디 계셨나?

“나, 거기 있었다.”


-어떠셨나?

“앗, 뜨! 뭐 그런 느낌… 백만명이 부르는데, 그 백만명이 다 각자의 마음으로 간절하게 부르는데 내가 그걸 뭐라고 감히 말하겠나? 그때 생각했다. 아, 이건 이제 내 노래가 아니구나.”


71년 발표된 ‘아침이슬’은 그의 험난한 인생의 출발점이었지만, 처음엔 누구도 그 노래의 장대한 후폭풍을 예감하지 못했다. 김민기 1집에 실린 곡 중 제일 먼저 방송금지된 것은 ‘꽃 피우는 아이’. “무궁화꽃을 피우는 아이, 이른 아침 꽃밭에 물도 주었네. 날이 갈수록 꽃은 시들어 꽃밭에 울먹인 아이 있었네”로 시작하는 가사가 화근이었다. 72년 서울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김민기가 이 노래를 부른 것 때문에 그의 레코드는 전량 압수되고 그는 동대문서로 연행되었다. 그는 불온한 사상범이 되고, 수시로 체포, 고문, 취조받는 일상이 이어졌다. ‘아침이슬’은 그 와중에도 은밀한 바람처럼, 소리 없는 잉걸불처럼 퍼져나갔다. 결국 75년엔 구체적 사유도 명시되지 않은 채 금지곡이 되었다.


“내 몸서 나간 ‘아침이슬’ ‘상록수’

나간 것 백배가 돼 돌아와 버거워

1987년 시청앞 이한열 노제때

백만명 부르는데 앗, 뜨 그런 느낌

아, 이제 내 노래가 아니구나”

“우리말의 생동성 처음 깨우쳐준

김지하에게 무한한 고마움 가져

그러나 정치적 입장에는 전혀…

나와 무관하고 영향 준 바도 없어

난 뭐 코멘트 할 게 없지”

나를 죽이던 사람들, 나 때문에 죄를 짓는구나


-몇 번이나 잡혀갔나?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그게 트라우마로 남지 않던가?

“서소문에 범진사라고 있었어. 보안사 취조실. 들어가니까 하사관들이 딱 들고 오는 게 사각형 각목이었는데 걔네는 베테랑들이지. (패는 시늉) 다다다닥… 그때 아, 내가 죽는구나. 그런 느낌을 처음 받았어. 한참 맞다 보니까 의식이 희미해지면서 패는 놈들 모습이 슬로비디오로 보이는 거야. 나 죽는 거, 아픈 거는 감각이 멀어지고. 근데 걔네들한테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더라구.”


-미안했다고?

“한없이 미안해지는 게, ‘나 때문에 이들이 죄를 짓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어.”


-그게, 몇 살 때인가?

“스물서너살? 그러고 풀려났는데 그때 한참 해방신학이 뜰 때였지. 누가 그러데. 본회퍼 목사가 ‘히틀러는 총으로 쏴서 죽여야 된다’고 했다고. 근데 나는, 죽어가면서 나를 고문한 놈들한테 미안하고 죄송했다고 했다. 그래서 본회퍼 식의 해방신학은 아닌 것 같다 그랬지. 나중에 운동권 애들한테도 그랬어. ‘너무 미워하지 마라. 미워하게 되면 걔 닮아간다.’ 나중에 보니까 박정희 무지하게 미워하던 놈들이 박정희 비슷하게 되더라고. 내 참, 별 얘기까지 다 하네.(웃음)”


그거였을까? 괴물과 싸우면서도 괴물을 닮지 않고, 유순한 소년의 마음을 유지해올 수 있었던 이유가? 문득 가슴에 뜨거운 것이 복받쳐 올라 얼른 막걸리 잔을 비웠다.


-71년 얘기로 돌아가자. 김지하를 그 무렵 처음 만났다고 하던데, 당시로선 하늘 같은 선배였겠다.

“아니, 그러진 않았고… 미대 선배가 소개를 해줬는데, 혜화동 명륜다방에서 처음 만났지. 그때가 지하 형이 <오적>을 쓰고 도피할 때였는데 만나는 순간 느낌이 별로였다.”


-왜?

“수배 중이었는데 굉장히 럭셔리한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었거든.(웃음) 그 이후로 일을 참 많이 같이 했지. 친동생 이상이었어.”


그는 “지하 형”과의 관계를 과거형으로 말했다. 오랜 기간 김지하와 나눈 인간적 우애에도 불구하고, 지난 대선기간에 김지하가 보인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일’ 이후로 다시 만나지도, 연락을 주고받지도 않고 있다고 했다.


-오랫동안 가까이 지내셨으니 그분이 왜 그랬는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지 않나?

“예전에도 문화운동 쪽에서는 김지하 옆에 내 이름이 늘 따라붙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꼭 하는 말이 있었다. 내가 김지하한테 무한한 고마움을 가지는 건, 내게 우리말의 생동성을 처음 깨우쳐준 선배라는 점. 문자에 갇혀 있지 않고 살아 있는 말의 생동성. 그게 판소리하고도 통하는 건데… 그래서 내가 학전 배우들한테도 유난히 강조했던 게, 배우는 ‘모국어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점이었다. 그 점에 있어선 여전히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난 그 양반의 사상적인, 정치적인 입장에는 전혀… 그건 나와 무관한 일이고 영향을 준 바도 없어. 최근 몇 년 동안 그 양반이 취한 행동에 대해서도 난 뭐 코멘트 할 게 없지. 그건 그 양반 생각이고.”


-화제를 좀 바꿔보겠다. 그렇게 많은 노래를 지었으면서 왜 변변한 연애 노래는 없나? 연애 안 해 보셨나?(웃음)

“하고 싶었지. 왜 그 나이에. 20대 초반에 연애를 안 하고 싶었겠어?”


-게다가 기타 잘 치는 남자는 인기도 많은데.

“내가 지금은 얼굴이 시커멓지만 그때는 아이돌이었어.(웃음)”


-그런데 왜 연애 노래가 없으시냐고?

“(답답하다는 듯) 내 뒤에 항상 기관원들이 따라붙고 있는데 어떻게 연애를 하나? 친한 친구를 길거리에서 만나도 모른 척하고 다니던 땐데.”


-남들은 도망 다니면서 연애만 잘하던데.(웃음)

“연애는 숨어서 할 수 있는지 몰라도 노래를 만들기까지는 숙성이 돼야 해.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숙성을 시킬 여유가 없었어.”


-안타까운 일이네.

“내 가사 중에 사랑이란 낱말이 뭐냐고 물어보는 노래가 하나 있어. ‘두리번거린다’에서….”


그의 얘길 듣고 노랫말을 나직이 읊조려 보았다.


“헐벗은 내 몸이 뒤안에서 떠는 것은/ 사랑과 미움과 배움의 참(眞)을/ 너로부터 가르쳐 받지 못한 탓이나/ 하여 나는 바람 부는 처음을 알고 파서 두리번거린다/ 말없이 찾아온 친구 곁에서/ 교정 뒤안의 황무지에서.”(‘두리번거린다’ 1972년 작)

외로운 스물한살 청년의 프로필이 머리 희끗한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밤은 깊어가고 우리는 아직 할 얘기가 절반이나 남아 있었다. <다음주에 계속>

녹취 함규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 이진순 언론학 박사. 전직 교수. 살림하고 애 키우는 오십대 아줌마이자 공부하고 글 쓰는 열혈시민이다. 서울대 사회학과와 럿거스대 커뮤니케이션스쿨을 졸업했다. 미국 올드도미니언대학 조교수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을 강의했고 그 전에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다큐멘터리 작가로 다양한 인물을 취재했다. 세상의 새 지평을 여는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김민기를 만든 시간들[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1951년 3월31일 전북 이리(현 익산시)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출생. 아버지가 인민군에 피살당해 유복자로 태어남.

1963년 서울로 이사. 재동국민학교(현 재동초) 졸업. 경기중 입학해 미술반 활동.

1966년 경기고 입학. 서울대 음대 다닌 셋째 누나한테서 기타 선물 받고 독학으로 연습. ‘친구’ 작곡.

1969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 입학. 미대 동기이자 고교 동창인 김영세와 듀오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 활동.

1970년 양희은 만남. ‘아침이슬’ 작곡해 양희은 통해 발표.

1971년 <오적> 쓰고 도피 중인 김지하 만남. ‘민중 주체의 민족문화운동’(김지하) 지향하는 모임 ‘폰트라’(쓰레기 더미 위의 시) 참가. 신정동 야학, 인천 도시산업선교회 활동. ‘아침이슬’, ‘친구’ 등 담긴 음반 <김민기> 출시.

1972년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금지곡 지정된 ‘꽃 피우는 아이’ 불렀다 음반 전량 압수, 동대문경찰서 연행.

1973년 김지하 희곡 <금관의 예수> 공연 참가. 주제가 ‘주여 이제는 여기에’ 작곡.

1974년 70년대 마당극 운동의 시발점으로 평가받는 마당극 <아구> 제작 참여. 10월 카투사로 군 입대.

1975년 보안부대 소환된 뒤 최전방으로 배치. 군 생활 동안 ‘식구 생각’, ‘늙은 군인의 노래’ 등 작곡. ‘아침이슬’ 금지곡 지정.

1977년 5월 제대. 인천 부평 봉제공장 취직. 동료 공장노동자의 합동결혼식 축가로 ‘상록수’ 작곡. 공장 생활 중 대학 졸업장과 중등교사 자격증 받음.

1978년 ‘상록수’, ‘밤뱃놀이’, ‘천릿길’, ‘늙은 군인의 노래’ 등 김민기 노래로만 채워진 양희은 공식 음반 출시. 노래굿 ‘공장의 불빛’ 제작. 중앙정보부 연행 뒤 훈방. 고향 전북 익산으로 내려감.

1979년 10·26 뒤 전북 김제로 거처 옮겨 소작농 생활.

1981년 황석영 주도로 만들어진 극단 ‘광대’ 창립 기념공연. 김제·전주지역 연극패들과 마당극 <1876년에서 1894년까지> 창작. 경기 전곡에서 참깨 농사, 충남 보령에서 탄광 일.

1983년 농촌 생활 접고 서울로 돌아옴.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연극 <멈춰 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 연출.

1984년 음반 <노래를 찾는 사람들1> 제작.

1985년 아동 뮤지컬 작업 같이 한 인연으로 만난 이미영과 결혼. 서울 불광동 두 칸 전세방에서 어머니와 두 조카와 함께 살림 시작. 당시 나이 서른다섯.

1987년 ‘6월 항쟁’으로 금지곡 일부 해제. 탄광촌 이야기 담은 아동 뮤지컬 <아빠 얼굴 예쁘네요> 발표.

1989년 한살림모임 창립해 초대 사무국장 지냄.

1991년 한민족의 노래를 발굴해 보급하자는 취지로 제작된 음반 <겨레의 노래> 총감독, 학전 소극장 개관.

1993년 직접 부른 39곡 수록된 음반 <김민기 전집> 발표.

1994년 5월 국내 최장수 기록 가진 뮤지컬 <지하철1호선> 공연 시작.

1995년 록 오페라 <개똥이> 공연.

1997년 록 뮤지컬 <모스키토> 공연.

1999년 김광석 추모사업회 회장. 포크음악 30주년 기념한 김민기 헌정 공연에 불참.

2001년 37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대상 및 연출상 수상.

2007년 독일 바이마르 괴테 메달 수상.

2008년 <지하철1호선> 종연. 15년 동안 4천회 공연, 71만명 관람.

연표[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 1951년 3월31일 전북 이리(현 익산시)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출생. 아버지가 인민군에 피살당해 유복자로 태어남.
  • 1963년 서울로 이사. 재동국민학교(현 재동초) 졸업. 경기중 입학해 미술반 활동.
  • 1966년 경기고 입학. 서울대 음대 다닌 셋째 누나한테서 기타 선물 받고 독학으로 연습. ‘친구’ 작곡.
  • 1969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 입학. 미대 동기이자 고교 동창인 김영세와 듀오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 활동.
  • 1970년 양희은 만남. ‘아침이슬’ 작곡해 양희은 통해 발표.
  • 1971년 <오적> 쓰고 도피 중인 김지하 만남. ‘민중 주체의 민족문화운동’(김지하) 지향하는 모임 ‘폰트라’(쓰레기 더미 위의 시) 참가. 신정동 야학, 인천 도시산업선교회 활동. ‘아침이슬’, ‘친구’ 등 담긴 음반 <김민기> 출시.
  • 1972년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금지곡 지정된 ‘꽃 피우는 아이’ 불렀다 음반 전량 압수, 동대문경찰서 연행.
  • 1973년 김지하 희곡 <금관의 예수> 공연 참가. 주제가 ‘주여 이제는 여기에’ 작곡.
  • 1974년 70년대 마당극 운동의 시발점으로 평가받는 마당극 <아구> 제작 참여. 10월 카투사로 군 입대.
  • 1975년 보안부대 소환된 뒤 최전방으로 배치. 군 생활 동안 ‘식구 생각’, ‘늙은 군인의 노래’ 등 작곡. ‘아침이슬’ 금지곡 지정.
  • 1977년 5월 제대. 인천 부평 봉제공장 취직. 동료 공장노동자의 합동결혼식 축가로 ‘상록수’ 작곡. 공장 생활 중 대학 졸업장과 중등교사 자격증 받음.
  • 1978년 ‘상록수’, ‘밤뱃놀이’, ‘천릿길’, ‘늙은 군인의 노래’ 등 김민기 노래로만 채워진 양희은 공식 음반 출시. 노래굿 ‘공장의 불빛’ 제작. 중앙정보부 연행 뒤 훈방. 고향 전북 익산으로 내려감.
  • 1979년 10·26 뒤 전북 김제로 거처 옮겨 소작농 생활.
  • 1981년 황석영 주도로 만들어진 극단 ‘광대’ 창립 기념공연. 김제·전주지역 연극패들과 마당극 <1876년에서 1894년까지> 창작. 경기 전곡에서 참깨 농사, 충남 보령에서 탄광 일.
  • 1983년 농촌 생활 접고 서울로 돌아옴.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연극 <멈춰 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 연출.
  • 1984년 음반 <노래를 찾는 사람들1> 제작.
  • 1985년 아동 뮤지컬 작업 같이 한 인연으로 만난 이미영과 결혼. 서울 불광동 두 칸 전세방에서 어머니와 두 조카와 함께 살림 시작. 당시 나이 서른다섯.
  • 1987년 ‘6월 항쟁’으로 금지곡 일부 해제. 탄광촌 이야기 담은 아동 뮤지컬 <아빠 얼굴 예쁘네요> 발표.
  • 1989년 한살림모임 창립해 초대 사무국장 지냄.
  • 1991년 한민족의 노래를 발굴해 보급하자는 취지로 제작된 음반 <겨레의 노래> 총감독, 학전 소극장 개관.
  • 1993년 직접 부른 39곡 수록된 음반 <김민기 전집> 발표.
  • 1994년 5월 국내 최장수 기록 가진 뮤지컬 <지하철1호선> 공연 시작.
  • 1995년 록 오페라 <개똥이> 공연.
  • 1997년 록 뮤지컬 <모스키토> 공연.
  • 1999년 김광석 추모사업회 회장. 포크음악 30주년 기념한 김민기 헌정 공연에 불참.
  • 2001년 37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대상 및 연출상 수상.
  • 2007년 독일 바이마르 괴테 메달 수상.
  • 2008년 <지하철1호선> 종연. 15년 동안 4천회 공연, 71만명 관람.


수상 이력[쉬운편집 | 소스편집 | 접기]

  • 백상예술대상 음악상 '개똥이'
  • 한국평론가 협회 음악극 부문 연극상
  • 서울연극제 극본상, 특별상 《지하철 1호선》
  • 한국연극협회 '98 우수공연 5' 단체상, 번안상 《의형제》
  • 제35회 동아 연극상 작품상 《의형제》
  • 제6회 한국 뮤지컬 대상 특별상
  • 제37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분 대상 및 연출상 《의형제》
  • 파라다이스상 문화예술부문
  • 괴테 메달
  • 제5회 더 뮤지컬 어워즈 공로상
  • 제10회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
  • 2018년 대중문화예술상 문화훈장 은관



김민기(1971) [Full album]



김민기 1(1993)[Full album]



김민기 2(1993)[Full album]



김민기 3(1993)[Full album]


김민기 4(1993)[Full alb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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